성도는 먼저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다음에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는 능력의 삶을 살수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간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이 있는데 대체적으로 인간은 참으로 약하다
한 예로 ‘내 사전엔 불가능이 없다’라고 한 나폴레옹-유럽을 호령했던, 집에 돌아오면 고독감과 외로움 때문에 조세핀을 붙잡고 엉엉 운 적이 많았다고 한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지 할 곳을 찾는 약한 존재인 게 인간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힘이 없으면 인간은 아마도 자연계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사자나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고 새 처럼 날 수도 없으며 개처럼 소리도 잘 듣지 못하고 독수리 처럼 멀리 보지도 못하는 제한이 많은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성경에서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질그릇(clay jar)이라고 부르셨다. 즉 깨워지기 쉽다는 뜻이다. 조금만 과로해도 쓰러지고 힘들면 병에 걸리고, 병마 앞에서는 질그릇과도 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육적, 영적으로 모든 면에서 진실로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령의 능력이 살아 있을 때 결코 약하지 않다. 롬 8:26은 믿는 자에게 임하시는 성령을 묘사한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시다.( Helper) 부족한 부분을 채우시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시며 약한 것을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성령님 때문에 우리는 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럼 성도들에게 약한 부분은 어디 일까?
기도하는 부분이다.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밤새도록 놀 수 있다. 밤새도록 일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도는 어렵다. 왜냐면 노동 중의 노동이요 그것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광야로 가자 하면 광야로 갔고 심지어 죽으러 가자 하면 죽으러 갔다. 그런데 어디에서 넘어졌을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라고 하시니 다 넘어졌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는데 세 번이나 잠자는 모습을 보였다. 기도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이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은 무엇보다 성도의 기도를 돕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기도로 말미암아 연약한 우리들을 변화시켜 강력한 하나님의 도구로 만드신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란 기도하는 사람이다.
롬 8:26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기도의 내용까지도 결정해 주신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기도할 때에는 항상 엉뚱한 것만을 구하게 된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간구:
하나는 주의 우편,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다.
예수의 대답:
너희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잘못 구할 때는 헛된 기도가 될 수 있다.
어린애가 칼을 달라고 하는데 주는 부모는 없다. 구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복이 아니다.
금에 눈이 뒤집힌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소원은 자기가 손대는 것마다 전부 금으로 변화되는 것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소원대로 정말 그런 능력을 갖게 되었다.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 금이 되었다. 그리고 금방 부자가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만지는 것마다 금이 되니 심지어는 사람을 만져도 금이 되어 나중에는 모든 사람에게 재앙의 씨가 되어버려 음식도 못 먹고 결국에는 죽었다고 한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나중에 보면 굉장히 헛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구하지 못함:
26절에서 처럼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모른다.
성도 안에 있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모든 길을 인도해 주신다.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신다.
성도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확신을 붙들고 결코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존재이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들, 그 모든 것들이 지나고 보니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믿는 성도들은 결코 두려움이나 걱정에 빠지지 않는다.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는 결코 초조해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큰 일 났다고” 호들갑 떨지 않는다. 믿음이 없으니까 실제로는 아무 일도 아니데 큰 일 같이 보인다.
베드로의 경우- 예수님과 배에 탔을 때. 죽겠다고 호들갑 떨던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에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잠을 잤다. 깊이 자서 발로 차서여 깰 정도였다. 이것이 성도의 여유이다. ‘내 앞에 사형선고가 있든지, 위험이 있든지, 내 앞에 실패가 있든지 어떤 넘지 못할 큰산이 있다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이 성도의 여유이다.
어느 어촌 마을에 고기잡이를 나간 배가 있었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 오지 않았다. 풍랑은 거세지는데 돌아오지 않는 배를 기다리며 걱정했다. 온 동네가 걱정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떤 어린애가 집에서 촛불을 넘어뜨려 집에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은 불 끄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큰 재앙인가! 사람들은 돌아 오지 않고 집은 불이 나고 얼마나 가혹한 시련인가! 아침에 되자 고대하던 배가 돌아왔다. 사람이들이 말했다. 풍랑 속에서 할로를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육지 쪽에서 불길을 보고 항로를 바로 잡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집에 불이 나지 않았다면 가장을 잃을 수 있었다. 그럼, 이 때 불은 재앙이었을까? 아니면 구원의 등불이었을까?
한 가지 사실만 바라보면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것은 시험이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증거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믿는 사람들이다.
지난 과거에 있었던 일 중에서 내가 진정으로 바랬는데 만일 그것이 이루어 졌다면 지금 내 자신이 만족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에 그렇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
첫째, 승리에 대한 확신이다.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예) 어릴 때 싸우다가 부모님이 보이면 힘이 난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고 도우심을 믿는 자는 세상 앞에 담대하다. 시편 3:6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왜 두렵지 않을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느냐는 견고함 때문이다. 사람의 눈치 볼 것도 없고 어떤 위협에도 갈등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성령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두 번째 특징: 모든 것을 받을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가장 귀한 것(예수님)까지 주신 분인데 그보다 덜 귀한 다른 어떤 것도 안 주실 있게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확신이다.
세 번째 특징: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33절, 34절 “누가 정죄하리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는 참 간사한 존재이다.
마귀는 말한다. ‘너는 죄를 지었으니까 이제 구원을 틀렸다. 모르고 짓는 죄는 몰라도 너는 알고도 일부러 짓지 않느냐? 너 같은 나쁜 사람은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고 고소한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 같다. 마귀가 이렇게 고소할 때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래. 나는 구원받을 수 없고 죄인이다. 그러나, 너무도 놀랍게도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 아니다.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존재이다. 이 진리는 결단코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근거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속을 바라볼 때는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서 마귀가 하는 말이 다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예수님의 피 때문에 내 구원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심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부족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고 끝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다.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 내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성도이다.
그래서 이런 구원의 확신에 찬 성도는 38,39절처럼 구원의 감격에 찬 목소리를 외칠 수 있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도의 연역함을 도우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마땅히 구할 바를 가르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 어느 길로 가든지 어떠한 실패나 어려움에 처하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러한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요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땐 승리의 확신이 생기고 어떠한 마귀의 궤계가 있다 할지라도 시험과 환난과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은 어떤 위치에 놓인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끝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삽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도움으로 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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