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사랑은 율법의 완성 - 로마서 13장 8-14절

차작가 2023. 11. 16. 11:46

진정한 제자의 삶은

첫 번째는 댓가를 치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 포기, 자기 부인을 해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자세로 살고자 하는 제자들의 삶에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것들을 살펴보고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본문은 요즘 시대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지침서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8-10절까지는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11-14절까지는 깨어서 정신 차리고 살라는 것이다.

두 가지 주문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에는 용서와 긍휼이 있어서 매우 평화로운 느낌인데 정신 차리고 살라는 말씀은 매우 전투적으로 들린다.

12절 하반부에,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갑옷이란 단어가 매우 호전적인 이미지이다.

빛과 갑옷 이 두 가지가 성도들에게 동시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는 어떤 때는 평화의 이미 지나 온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어떤 경우는 전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마지막 때에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예수님도 상반되는 두가지면을 강조하셨다. 마 10:16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성도의 삶을 뱀의 이미지와 비둘기의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다.

뱀의 예리함, 현명한 판단, 결정력들을 갖추어야 하며 비둘기의 순결하고 깨끗한 모습도 갖추어야 한다.

한 가지만 있으면 문제가 된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에서 보면 ‘강단에 설 때에는 사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강단에서 내려온 후에는 양이 되십시오.

복음 전할 때의 모습은 불같고 마귀와 싸울 때는 하나님의 군사와 같아야 한다. 그러나 교제할 때는 온유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첫 번째 기둥인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부터 살펴보자. (8-10절 말씀)

엄청나게 많은 계명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모든 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래서 10절에서처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완성이라는 원어는 ‘플레로마’로 충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을 사랑은 율법의 충만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사랑만이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 율법의 요구란 무엇인가?

그 첫째는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 9절처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런 십계명이 요구하는 도덕적인 가치는 오직 사랑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 자기 아내와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간음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살인도 못한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도 않는다. 사랑이란 남을 품어주고 남의 유익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충만하면 이러한 십계명을 잘 지킬 수 있다.

율법의 두 번째 요구 조건은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런데 사람이 죽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짐승이 대신해 죽었다. 그런데 항상 죄를 지으니까 매번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러한 불완전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 사항인 죽음을 만족시키고(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 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만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 것이다.

고전 1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고 아니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하다.

어거스틴은 ‘하나님만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난 다음에는 마음대로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말한다. 부모를 사랑하면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럼, 어떻게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법을 살펴보자

8절 말씀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의 핵심은 ‘빚을 지지 말라’가 아니라 ‘사랑의 빚은 지면서 살아라’는 뜻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 두 번째는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사람이다. 나 혼자 살겠다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전에,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사람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다. 이것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시간과 돈과 인생을 들여서 예수를 증거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것 아닌가?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놀랍도록 경험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데 이 정도에 넘어질 수 있겠나’하는 마음으로 좌절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을 지탱하던 모든 감정은 바로 이 빚진 자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주위 사람들과 교회 그리고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며 ‘빚진 자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종종 저희 아이들로 하여금 깊이 깨달을 때가 있다. 우리 아들 예일이는 옷을 물려 입는 것에 창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냐면 ‘나를 특별히 생각해서 준 것’이라고 감동한다. 왜냐면 예일이는 자기 것 줄 때 항상 자기에게 필요하지만 좋은 것을 남에게 주기 때문에 남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절의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라는 말은 말세에는 잠들 수 있는 유혹이 많다는 뜻이 된다. 성도는 이 땅을 살아갈 때 위기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날마다 우리를 넘어 뜨리는 세력이 있다. 정신 차리고 성도의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든지 시험에 들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정신 차리고 살 수 있을까?

첫째, 어둠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성도는 어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둠은 죄의 세력이다. 죄의 세력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죄의 세력은 때로는 분명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고 전혀 느끼지 못하게 찾아온다.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죄의 세력에 빠져 있을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긴장하지 않으면 교회도 죄의 세력에 빠져 허둥 되기도 한다. 신천지 같은 이단 세력에 넘어갈 수 있다. 교회의 본질적 속성인 거룩을 잃어버릴 수 있다.

둘째는 12절에서 찾을 수 있다. 12절의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는 말의 뜻은 다음과 같다. 지금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빛이 우리에게 왔기 때문에 낮의 세력이 성도들에게 임하였으나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은 밤이다. 즉 성도들은 여전히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눅 16:8). 따라서 지금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죄의 세력에 대한 전투적인 삶이다. 전쟁을 하러 나가는 군사들이 갑옷을 입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갑옷을 입어야 하는데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빛의 갑옷은 14절에서처럼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주시는 권능의 힘을 입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권능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 한번 죽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날마다 죽어야 한다.

죽어버리면 악한 세력이 틈타지 못한다. 나 자신이 살아있으면 예수님의 권능이 임하지 못한다. 그러나 죽어버리면 비로소 예수님의 권능이 임한다. 이럴 때 우리는 악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유니폼을 보면 어떤 회사 어떤 직업인지를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있으면 크리스천임을 드러내고 투명한 생활을 하면 유혹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가톨릭 신부가 신부복을 입고 사창가를 갈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면 우리는 단정히 행할 수 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않고 쟁투와 시기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되면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게 되어 정욕을 위한 삶을 살게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