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를 않으셨다. 이것은 제사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요 바치는 제물이 서로 달랐기 때문도 아니다. 만약 제물이 아벨과 다른 것이 이유라면 제물만 받지 않으시면 된다. 사실은 곡물을 제물로 드리기도 한다. 레 2장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가 그 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를 보면 제물에 대해서 구분하면서 이스라엘이 자기들 마음대로 제물을 가져올 수 없도록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제물이 따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멋대로 제사하는 것을 금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제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에 담기 위해서 제물을 구분하시고 여러 규례를 정해 놓으셨다.
따라서 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제사를 드렸느냐 드리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제사를 드렸으되 과연 어떤 마음과 자세로 드렸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즉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제사는 이스라엘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가인의 경우도 제물이 달랐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인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문제가 되었다. 가인은 단지 땅의 소산을 드렸다고 되어 있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다른 점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 새끼와 기름은 구별을 의미한다. 많은 양의 새끼들 중에서 아무 것이나 가져오지 않고 첫 새끼를 가져오고 제물의 여러 부위 중에서 기름만을 가져온다는 것은 구별을 담고 있다. 이처럼 구별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자신을 구별된 자로 보는 마음이 담겨 있는 행위가 된다. 반면에 가인이 땅의 소산 아무것이나 가져왔다는 것은 다만 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마음을 보여준다.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는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에 있다. 겉을 가지고는 구분 할 수 없다. 겉이란 얼마든지 꾸밀 수 있고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만 속은 같아야 하는 것이 성도이다. 그 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을 담고 있는 그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런데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이 없었다. 그래서 단지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은총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구별의 마음이 담긴 제물을 드릴 수가 있었다. 결국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을 거부하신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담고 있지를 않았다. 다만 제사를 드리면 된다는 것이 전부였다. 제사를 드림으로서 어떤 이득을 노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는 거부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면서도 오히려 책망을 받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먼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본다면, 사울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에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다. 아마 사울은 암몬 족속을 이긴 것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였으며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블레셋 수비대와 싸우도록 한다(13:2). 처음에는 승리하는 듯 하였으나 블레셋 군대가 많은 병력을 이끌고 믹마스에 있는 사울의 진을 공격해 들어오자 이스라엘 군은 모두 도망을 쳐버린다. 그리고 사울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길갈에 머물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8절의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라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8절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매우 난해하다.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렸다고 하는데, 사무엘이 언제 사울에게 이레라는 기한을 정했느냐가 문제이다.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람을 사무엘에게 보내서 이레를 기다리라는 답을 받았든 사울은 사무엘이 이레를 기다리면 온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면, 사울은 사무엘이 길갈로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레가 되도록 사무엘은 오지 않고 백성들은 사울에게서 흩어지고 만다. 그래서 사울은 번제와 화목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스스로 번제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왔다. 그리고 사울에게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사울은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11-12절)고 답한다.
여기서 보면,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약속대로 오지도 않는 사무엘을 무작정 기다리다가 블레셋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라도 나서서 제사를 드려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 위기를 해결해야겠다는 사울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오히려 따지고 보면 이레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무엘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닐까? 사울은 분명 이레라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다가 할 수 없이 스스로 번제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에 대해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절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13-14절)고 책망한다.
이 답변에서 우리는 사무엘의 처사를 동의할 수 있을까? 물론 제사는 제사장만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다. 따라서 왕이 제사를 주관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사울이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 있지 않을까? 목숨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만 아니었다면 사울도 제멋대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오겠다고 약속한 사무엘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기다리다 못해 직접 제사를 드린 것인데 그것으로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망령되이 행한 것으로 책망한다. 그렇다면 제사장도 아니면서 제사를 주관한 것이 망령되이 행한 것이 되는 것일까?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러한 내용이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예배의 주관자는 오직 목사뿐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울의 행동은 왜 망령된 것일까? 12절의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라는 내용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사를 드리고자 한 것은 여호와의 은혜를 받기 위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사울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여호와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여호와의 은혜를 받으려면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 동안 사무엘을 기다리느라고 미처 제사를 드리지 못해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히 은혜를 받아서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하겠기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결국 사울이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혜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사울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은혜는 자신을 위기에서 구출해 주는 힘이었다. 사울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에게 담겨 있는 은총과 자비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인간의 죄마저 이긴다는 것을 제사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분명 제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은혜는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출해 주는 능력으로서의 은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이기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이 존재함을 깨닫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이 곧 은혜였다.
그런데 사울은 은혜를 받아서 자신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다. 은혜만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망령되이 행했다고 책망하셨다.
십계명 중 삼계명에 보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일까? 바로 사울처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은혜를 구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곧 망령되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 기억해야 한다.
사울은 블레셋이 두려웠었다. 그래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제사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의식, 제사를 드리는 자기 행위를 믿는 것이다. 제사 자체를 의로 보는 것이다. 제사를 드렸으니까 은혜는 분명히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울과 현대 교회의 사고방식은 무엇이 동일할 까? 예배라는 의식 자체를 의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예배드린 자신은 의를 행한 것이 되고, 의를 행했기에 은혜를 받는다는 공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다. 헌금을 바치는 것을 의로 여기기 때문에 헌금을 한 자신은 의를 행한 것이고 때문에 은혜를 받게 되어 있다는 공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 은혜를 구할 뿐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호와의 이름에는 죄 속에 있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으시기 위한 모든 일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는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으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자비와 은총이 담겨 있고, 우리를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생명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 수고하시고 일하시는 은혜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구원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육신의 위기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멸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망령되이 행하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것은 세상의 분주한 사정과 형편을 그대로 안고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만 악한 우리의 생명을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담고 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고,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를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은혜를 입은 것이고 놀라운 기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교회에 올 때는 분주한 사정을 내려놓고 오고 나가서는 다시 짊어지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여려가지 분주한 일들과 형편들을 하늘의 생명이라는 은혜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어야 한다.
사울은 블레셋을 이겨야 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임을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사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설사 지금 고통과 어려움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를 더 깊은 은혜로 끌고 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성도는 어떤 일에서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보다는 나를 구원하신 그 은혜에 감격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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