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점은 ‘부활(Resurrection)’이다. 왜냐면, 다른 종교들에서는 이러한 개념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면, 예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역시 부활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사도바울은 오늘 읽은 고전 15장에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변증하고 있다.
본론:
1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먼저,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이라고 했다. 여기서 개역 성경은 ‘헛것’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헬라어 원어의 뜻은 ‘공허(empty)’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첫 번째로 우리의 전하는 것이 ‘공허’하고 우리의 믿음 또한 ‘공허’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지끔까지 역사적으로 행해졌던 모든 설교들과 가르침들은 모두 공허한 것이 된다. 사도들의 가르침도 공허한 것이요, 유명한 설교가들(조나단 에드워즈, 빌리그래함)의 설교도 모두 공허한 것이 되고 현제 선포되는 설교를 듣는 우리들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교회는 문을 닫는 게 나을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15절에서처럼 거짓 증인이 된다. 거짓말쟁이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중언하고 다녔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거짓 증언을 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17절에서처럼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가 된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상태로 영생에 대한 소망이 전혀 없는 상태 즉, 구원받지 못한 상태가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높으신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오신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부활하심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헛된 것이 되고 그의 죽으심이 헛된 것이므로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아 우리가 구원과 상관없이 여전히 죄가운데 있게 된다.
롬 4:25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의롭다 하심. Justification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이 의로움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인데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그럼, 부활하심이 없다면, 현재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만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있게 되는가? 18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 즉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잘 믿고 이미 죽은 자들조차도 이미 멸망하게 된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잠들어 있는데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19절에서처럼,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부활에 대한 소망 없이) 오직 이 세상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사도바울은 고전 1:2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들은 신명기 21장 23절: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율법의 기록을 믿었기 때문에 나무에 매달린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로 생각했다. 그 저주받은 사람을 가리켜서 메시아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당연히 No. 하고 꺼려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여기에서 이방인은 헬라인(지혜를 찾는 자)이다. 헬라인에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미련한 것이었다. 왜냐면 헬라인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구세주고 하나님이면 좀 이성적으로 하지. 좀 합리적으로 구원하지 왜 저렇게 야만적이고 매 맞고 모멸스럽게 구원하는가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은 십자가를 꺼리고 이방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던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를 전하는 자들이 그들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미련해 보이고 불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과 핍박을 받고 가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가족으로부터 배척 당하고 사회생활도 못할뿐더러 일도 할 수 없어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터키와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했다.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시간과 물질을 하나님께 정성껏 드렸다. 예수님을 위해 참고 견디고 어떤 어려움도 믿음으로 이기고 세상을 살았었는데 부활의 소망이 없음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돼버린다면 예수 믿고 따랐던 그들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어땠나?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느라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두들겨 맞으면서 여기저기 다녔고, 천대받아 가면서 살다가 나중에는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다 끌려 나와 참수형을 당한,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한 일생을 살았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고, 그가 전하는 예수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세상에 바울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게 된다. 그만큼 예수의 부활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이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 앞에 불쌍한 자가 아니고 영광스러운 자요, 가장 복받은 사람이요, 정말로 멋진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20절에서 결론을 말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들'이란 이미 세상을 떠난 자들을 가리킨다. 앞으로 우리가 죽어도 잠자는 자들이라고 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들, 즉 먼저 간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된다고 하셨다. 바울은 여기서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초실절의 첫 열매를 비유로 사용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추수기가 다가오면 들녘에 나가 먼저 익은 곡식들을 조금 베어 왔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 처음 익은 곡식단을 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드렸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번 농사에도 축복하시어 이른 비도 주시고 늦은 비도 주셔서 이렇게 추수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이제 앞으로 추수할 동안에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게 하옵소서.' 손에 들고 있는 처음 익은 열매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들판에 있는 모든 곡식이 다 익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열매이다. 그러므로 들녘에 있는 모든 곡식을 대표해서 첫 열매가 하나님 앞에 드렸다. 예수님이 바로 이 첫 열매가 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음에 예수 믿고 따라올 모든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 그다음에 다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다시 말하면 영과 육의 구원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나님 나라로 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소에 머무는 것이다. 완전 구원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영혼이 어느 때를 기다리고 있다. 땅에 묻힌 썩은 저 육신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입었던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부활하여 하늘에 있는 영과 결 합하는 영화로운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에는 영화라고 한다. 또 몸의 구속이라고도 말한다.
로마서 8장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완전한 구원을 주셨다.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신도 구원받는다. 영과 육이 결합해서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닮아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는 것이 완전한 구원이다. 이 구원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전하고 믿는 것이 공허하고 헛된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이며, 우리가 거짓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실만 말하는 자이며, 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자리에 있는 것이며, 불쌍한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임을 바울은 20절을 통해 역설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럼, 부활에 대한 믿음(신앙)을 우리들의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불만 중의 하나는 ‘ 이 세상이 매우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사는데, 부자인데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가? 다른 사람의 자녀들은 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좋은 대학도 잘 가는데 왜 우리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는가?
다른 아내들은 몸매도 날씬하고 매력적이고 아이들도 잘 양육하는데 왜 내 아내는 그러지 못하는가? 다른 남편들은 가정적인데 왜 우리 남편은 그렇지 못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는 행복하지 못할까? 그래서 세상이란 참으로 불공평한거야! 라고 생각한다. 그라고,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련을 주시는지? 왜 어려움과 아픔을 겪도록 허락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하루살이(dayfly)를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도 잘 알다시피, 하루살이는 단 하루만 살 수 있다. 어떤 하루살이가 한 마리 있었다. 그런데 이 하루살이는 태어날 때부터 불구로 태어나서 평생을(하루를) 살다가 죽었다. 이 하루살이는 분명히 불쌍한 하루살이였다. 이 하루살이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에 이 하루살이에게 구원의 길이 있어서 완전한 몸으로의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다면 그 하루살이는 더 이상 불쌍한 하루살이가 아닐 것이며 그 삶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닐 것이다. 하루는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만 끝나고 그 이상의 어떤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부활과 영생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힘들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과 비교하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롬 8:18에서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세상에만 집중하면 힘든 삶에 대한 해답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생각하고 소망을 두면 우리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겐 이 세상의 삶 자체가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부활과 영생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에겐 비록 이 땅의 삶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어떤 어려움에도 견딜 수 있게 된다.
결론: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바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럼, 부활의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골로새서 3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3:2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 취었음이니라’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땅에 것을 찾지 않고 위에 것을 찾아야 한다. 위에 것을 찾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순종’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는 지혜로운 건축가 이야기가 나온다.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폭풍과 홍수에도 집이 무너지지 않았는데 어리석은 건축가는 모래 위에 집을 지어서 폭풍과 홍수에 집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행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셨다. 따라서, 부활의 소망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또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을 향해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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