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 신명기 6장 1-9절

차작가 2023. 11. 15. 11:44

서론:

아들이 독립을 한다. 집과는 다른 환경에서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야 하는 생각을 하면 당사자 보다 부모가 더 마음이 쓰인다. 낯선 환경에 먼저 잘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어떻게 잘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준비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집에서는 실수해도 다 눈감아 주고 용서가 되는데 사회는 그렇지 않다. 문화가 그렇게 건전하지 않는데 그런 문화에 휩쓸려서 혹 잘못 가면 안되는데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신앙생활이 제일 염려가 된다. 무엇보다도 세상적 가치만 추구하는 가운데서 신앙인으로 가치를 잊어 버리면 안되고 항상 기독교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도록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본론:

오늘 본문도 아마 저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 같다.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셔 광야로 인도하시고는 40년간 함께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 하셨던 하나님이 이젠 약속의 땅 가나안 땅 입성을 앞에 두고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이 본문의 말씀이다. 마치 제 아들을 집에서 떠나 낯선 환경에 보내는 마음과 같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들으셔야 더 감동적이다.

1. 본문이 주어진 때

오늘 본문이 언제 주어졌는가를 알 수 있는데 1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요단강이다. 지금 있는 곳은 광야이다. 강 건너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가기 전에 필요한 것은 계명을 지키려는 자세이다.

가나안 땅이 말이 약속의 땅이지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한 땅이 아니다. 왜냐면 이미 그 땅은 여러 11개의 이방 민족들(가나안, 히위, 여부스등)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 나라들을 모두 다 이스라엘 보다 문명도 앞서고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 민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을 모르고 온갖 우상을 섬김으로 타락하고 패역한 땅이었다.

가나안 족속은 특히 가증한 우상숭배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을 가나안 땅에 남겨 둘 경우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반드시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다. (신 20:15-18) 하나님은 가나안에 땅에 속한 모든 것을 진멸의 대상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로 완전히 태워 버리라고 요구하신다. 이것은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받게 될 우상숭배라는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였다. 그들을 살려 둔다면 이스라엘 자손을 유혹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게 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그 땅이 그들을 토해 낼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진멸만이 이스라엘이 살아 날 수 있는 길임을 알려 주셨다. 따라서 진멸법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 은혜의 방편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을 정복하여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원하셨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그 땅을 정복하기엔 너무도 갖춘 게 없었다. 제대로 된 무기 하나 없고 제대로 된 훈련 프로그램도 없었으니 가나안 정복이 쉽지 만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은 잘 아셨다.

이런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무기를 만들고 또 군사훈련도 하라고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여호수아 1장에 나온다. 모세가 죽고 가나안 땅 정복을 앞에 두고 두려워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다.

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계명을 묵상하고 지키면 평탄하고 형통케 된다는 말씀이다. 형통은 하나님의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 결국 계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호수아서(평탄케 됨)나 본문에서 볼 때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는 복을 주시려고 하심 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enjoy long life)이라 (2절)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3.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나?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다 (4절)

왜 이 말을 하시는가? 가나안 땅엔 수 많은 이방 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방신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릴까? (마치 제 아들이 세상의 가치관들로 가득 찬 곳에 들어가서 혹시 크리스천의 가치를 상실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같다)

그 땅에 존재 한 신들에 관해서:

엘: 가나안족들이 신으로 섬긴 주신 (돌로 만듦) 하나님 격에 해당된다.

아세라: 엘의 부인. 행복을 가져다 주는 번영과 풍요의 여신이다. 성적인 방종신( 신전에서 집단 혼음) 아세라상은 나무로 만들어서 땅에 곧게 세움. ※ 아합의 왕비 이세벨은 아세라를 섬겼던 대표적 인물(왕상 18:19)

바알: 비와 풍요의 신으로서 바알은 팔레스타인의 농경적인 환경에서 매우 중요한 신이었다. “엘”의 아들로서 중동 지역의 보편적인 신, 비와 폭풍의 신,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 준다 고 믿어졌던 가나안의 男神 바알의 누나 “아낫”이라는 여신과 결혼하여 부부 관계로 있는데, 어느 날 바알이 지옥의 신 못(Mot)과 전쟁하러 나갔다가 패하여 그에게 지옥으로 끌려가 버리면서 乾期가 시작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낫이 가만히 있지 않고 남편인 바알를 구하기 위해 지옥 에 직접 내려가 “못”과 싸워 남편을 구해 함께 올라오게 된다. 그래서 부부가 다시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될 때 땅의 곡물이 자라도록 비(雨期)가 다시 내리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알은 비의 신, 풍요와 다산의 신, 농사의 신이 된 것이다.

백성들은 바알과 아낫의 성적 활동을 자극하기 위하여 신전에서 신도들과 제사장 혹은 신전 창기와 소위 “성스러운 매음”을 행했다. 이 신전 매음에서 남자는 바알, 여자는 아낫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간 남녀가 바알과 아낫의 성적 행동을 모방하면 이 신들을 결합시켜 출산력을 높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 새로 우기가 시작되어 비가 내리게 된다고 하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을 인도하신 여호와는 전쟁에서 승리하신 신이지만, 농 사의 신은 바알이기 때문에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바알에게 제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계신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乾期와 雨期가 7번(완전 수) 경과되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셨다가 다시 내리게 하여 자연의 비 와 기후를 주관하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에게 미혹되었던 것은 바알을 섬기던 가나안인들을 모두 쫓아 내지 않아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농경 생활을 주로 하면서부터 바알이 비를 내려준다 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엄격한 규칙들과는 대조적으로 성적인 무절제를 정당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바알 종교의 감각적인 요소들 은 매력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 외 아낫, 아스다롯, 몰렉등 약 80개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바알은 무엇인가? 하나님도 섬기면서 바알도 섬기는 똑 같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4절에서 하나님을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유일한 하나님의 의미는?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고 예배할 신이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실제로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 유일하신 여호와를 떠남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우리는 똑같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돈, 권력들) 때문에 하나님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있지는 않나?

4. 그리고 하나님은 또 어떤 자세를 요구하실까? 사실 오늘 본문의 중심이다. (결론)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5절)

1.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내가 잘 살 수 있을까'에 관심 두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까'에 모든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2.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맡겨진 실천적인 문제로 보면 안 된다. 즉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만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 보려고 애쓴다면 결국 제풀에 지치고 말 것이다. 지금 많은 신자들이 신앙에 낙심하고 지치고 방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애쓰다 보니까 해도 해도 끝이 없게 되고 결국 낙심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조건을 보고 함께 하실만하면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씀에 거하지 못하고, 잘못을 범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기쁨은 보지 못하고 자신이 열심히 함으로써 그 결과를 가지고 기쁨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고 낙심하게 되고 금방 기뻤다가도 금방 낙심하게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기를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일들을 누리고 감사하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긍휼을 생각하며 가나안 땅의 신들을 바라보지 말고 가나안 땅의 앞서가는 문명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 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세상의 힘을 사랑하고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지는 않나?

5. 하나님을 사랑하면 죄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나는 왜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가?'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도 '지옥 가기 때문에'가 아니고 '징계를 받을까 봐'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구원받은 신자의 모습이다. 이런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율법이 시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연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6. 롬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신자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율법을 잘 지킬 것인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을까에 만 두어야 한다.

7. 이런 확신이 있으면 우리는 본문 6-9절 말씀이 부담으로 오지 않는다. 이 말씀을 법적인 위치에서 이해하게 된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애써야 하고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말씀을 강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갈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법적인 차원에서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니까 안 하겠다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은 행동은 할 수 없다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이다.

1절에서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라고 말씀하는 것도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것은 어떤 규칙이나 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가르치며 앉았을 때든, 누웠을 때든, 일어날 때든, 걸어갈 때든 이 말씀을 강론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8.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람은 말씀을 지킬 수 없다.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주님이 오셔서 모든 것을 대신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하든지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생명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율법의 영향을 받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며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해서 내 속에서 역사 하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9. 그런데 이러한 삶이 순탄하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순간 되었다고 해서 계속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으라' '지켜라'라는 권면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믿어야 하고 내가 지켜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주님께만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날마다 진리 위에 굳게 서있기를 권면하는 말이다.

10. 사단은 항상 신자에게 찾아와서 유혹한다. 은혜와 사랑을 벗어나서 자기를 바라보게 함으로 자신이 마치 신자가 아닌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신자가 되어보라고 부추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마다 말씀되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고 동행함으로써 내가 누구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것이다. 이것이 믿고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