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하나님과 성도 앞에 존귀한 자 - 빌립보서 2장 25-30절

차작가 2023. 11. 16. 11:53

도입: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도 학생 때 땅콩 박사로 유명한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1941년 타임지에서 조지 워싱턴 카버를 검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했다.)를 존경했다. (멕시코에서 들어온 바구미가 목화밭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카아버는 농민들에게 목화 대신 땅콩을 심기를 권장하였고, 땅콩을 심다 보니 많은 땅콩을 주체하기 힘들에 되었다. 카아버는 땅콩 처리 문제 해결 위한 연구 끝에 105가지의 땅콩 요리법을 만들었고, 잉크, 물감, 구두약 등 200종류 정도의 생활필수품도 발명 하였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땅콩 박사’라 부르게 되었다. 언젠가 미국의 한 유명한 상원 의원이 카버 박사에게 “당신은 도대체 그 모든 것을 어디서 배웠느냐"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책이었지요” 라고 카버가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책입니까” 그 상원 의원이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나님의 말씀! 바로 성경입니다” )

그리고 많은 훌륭한 목사님이 많이 계시지만 굳이 한분 만 꼽으라면 미국 영적 대각성 운동의 중심이 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뽑고 싶다.(노스햄턴에 있는 교회 방문 한적이 있다) 왜냐면 신학자로서 또한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다가 가신 분위기 때문이다. 신학과 목회를 정말 균형 있게 하신 분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먼저 70개의 자기 결심 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는 가를 알 수 있다.

나의 전 생애 동안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행복과 유익과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자. 한 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만일 내가 교만이나 허영이나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을 좋아하 고 있다면 즉시로 그런 것들을 버리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고도 지속적으로 찾아내자. 그런 다음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과 싸우자.

본론:

A. 에바브로디도를 소개 => 존경 받을자로 소개하고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출신임을 알 수 있다. 25절에 ‘에바브로디도를 너희(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29절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 이유가 => 먼저 30절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이고 =>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목숨도 돌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왜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겨야 하는지가 25절에 나온다.

B. 에바브로디도는 누구인가? (25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 바울이 이렇게 소개한 사람은 없다. (심지어 디모데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진 않았다.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 정도였다.) 그만큼 본받아야 하고 존경 받는 사람이었다.

1. 형제

가족에서 형제는 부모의 피를 나눈 관계 처럼 교회에서 형제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 주심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형제로 부른 것은 그도 역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다. 누가 우리를 형제, 자매라고 불러 주는 것은 같은 아버지를 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들인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고 말씀 하심.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형제, 자매는 세상의 혈통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즉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예수님의 가족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예수님의 가족을 이 땅에서는 교회라고 부른다. 이들은 서로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한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서로의 생각과 사고방식의 주님의 것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님만 원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사람만 가족으로 여기신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아무리 무시당하고 비천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자가 예수님만 원하는 삶을 산다면 바로 예수님의 가족인 것이다.

세상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를 알고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의 나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기라고 부탁한 것은 그가 단순히 형제 된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또한 예수님만 바라 보고 예수님만 원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 참된 성도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형제된 사람을 향해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의 형제애를 볼 수 있다.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보내 감옥에 있는 동안 시중들게 했다. 그토록 에바브로디도를 아끼면서도 위대한 사도의 필요를 채우고자-형제간의 애틋한 사랑으로-먼 길을 떠나 보낸 것이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 그리고 로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기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바울의 형편을 빌립보의 성도들이 염려하고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자신대로 빌립보 사람들을 염려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가 로마에서 아주 요긴하고 도움이 되었음에도 돌려 보냈다. 빌립보 사람들의 필요를 우선시 했다. 형제간이란 이런 것이다. 혈연 의식과 서로를 향한 지대한 관심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2. 함께 수고한 자 = 동역자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다. 우리는 함께 수고하는 자이다. 왜 함께 수고해야 할까? 우리는 한 주인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에게 에바브로디도가 필요한데도 빌립보로 돌려 보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 똑 같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바울에게는 동역자였다. 이처럼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바울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복음을 위한 수고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주어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서나 나타날 수 있다. 그 증거로는 바울이 동역자로 말하는 사람들은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말하는 평신도들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얼마든지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바울에게 ‘동역자’가 된다.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위한 수고로 살아간다면 우리 서로서로가 동역자가 된다.

그리고 동역자란 목사가 같은 목사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의 일을 구하기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먼저 구하고 살아간다면 우린 서로 서로 그리스도의 일을 이루는 동역자의 관계에 있게 된다.

그런데 ‘동역자’의 관계로 나타나야 할 우리들이 때로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는 모습을 가진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포기하고 자기 일을 구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명성과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높음을 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연결되어야 할 관계가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배우고 이루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동역자’로서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기 일보다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기를 힘써야 한다. 목사와 성도 역시 이것을 근거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님에게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일하라는 것이다. 자기 일을 구하기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배울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배움이 없는 교회 생활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성도의 삶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명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3. 함께 군사 된 자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이다. 군대는 적과 싸우기 위해서 조직된 공동체 집단이다. 그럼,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바로 어둠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 들이다.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둠의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늘의 악한 영들과 싸우는 자는 함께 군사 된 자다. 우리는 우리의 적을 바로 알아야 하고 우리의 힘을 결집해서 악한 영들을 무찔러야 한다. 우리끼리 싸우고 힘을 소진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위해서 에바브로디도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30절) 악한 것들을 대적해서 바울과 함께 싸웠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에바브로디도의 구원 받은 자로서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 마땅한 사람의 인격을 한번 볼 수 있다.

C. 에바브로디도의 인격(사람됨) (26절)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성도들을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다. 자신이 병들었음을 빌립보의 성도들이 들은 것을 알고 심히 근심했다고 말한다. 자신의 병이 근심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병으로 인해서 빌립보의 성도들이 근심할 것을 근심했다. 이러한 마음은 1:8절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바울과 같은 마음이었다. 이처럼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에바브로디도 역시 바울에게는 같은 그리스도의 군사요 동역자요 형제였다.

바울과 에바브로디도 모두 자신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 된 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모습이다.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것이다.

 

D. 이런 그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고쳐 주심 (27절)

병들었으나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셨다. 바울의 근심도 면하게 하셨다.

그가 고향에 안전하게 도착해서 빌립보 교인들과 다시 만나는 기쁨을 누린다면 비로소 자기 마음이 놓일 거라는 말이다.

결론:

A.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권면 (29절)

1.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라

주 안에서 = 주와 함께 하는 성도는 이런 귀한 사람을 영접한다. 그리고 존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구원 받은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말이다. (우리는 구원 받기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 안에서 구원 받은 것을 누리는 공동체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헌신된 사람을 기쁨으로 영접하게 되어 있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 혹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헌신된 일꾼을 잘 영접하고 있느냐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애를 쓰고 헌신하는 형제 자매들을 아낌없이 후원하고 격려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된다.

2. 이 같은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

출세한 사람이나 혼자 우쭐대는 사람이 아니라 곤경 가운데서 자신의 믿음을 입증한 사람들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 자기 희생적 제사를 드리는 태도이다. 그래서 30절처럼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B. 귀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 (30절)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

목숨에 대한 위험이 박해로 보진 않고 유행성 질병으로 생각된다. 왜냐면 그가 행 안 가에 위치한 빌립보에 머물렀다면 유행성 질병에 걸리지 않았을 것인데 복음을 위해 바울을 돕고자 로마로 간 것은 그의 헌신이었기 때문이다.

C. 적용

어쩌면 에바브로디도와 비교해 보니까 ‘나는 믿음이 없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 때문에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음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분명 믿음이 있는 자이다.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살리셨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믿음이 있는 성도이다. 그런데 왜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에바브로디도의 삶은 믿음에 대한 순종의 결과이다. 믿음에 대해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로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에바브로디도를 닮은 삶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라는 문제로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는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 나는 아직도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는구나.’를 알았다는 것으로 됐다는 것은 아니다. 알았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고쳐져야 할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알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알게 된 것을 삶이 되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바브로디도에게서 보인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 우리가 생각할 때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수준 높은 신앙이라 해서 에바브로디도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밀쳐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힘으로 그러한 삶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려고 몸부림 친다면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실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것이 곧 나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순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