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은 다윗은 그의 셋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황급히 도망가고 있는 처지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도 아닌 친 자식에게 쫓기고 있어 수치스럽기까지 한데 사울 가문 출신의 시므이라는 자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더 수치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다윗 왕이 한낱 무시해도 좋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전무후무 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쫓겨가는 다윗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 일행을 따라가면서 다윗을 향해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라!”면서 돌을 던지고(돌을 던진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이다) 티끌을 날리면서 다윗을 심하게 저주했다(삼하 16:7).
그럼, 지금은 비록 쫓기는 신세지만 그래도 여전히 위대한 왕인 다윗에게 감히 이런 저주를 하는 시므이라는 사람은 누구이며 왜 그런 저주를 하는지 알아보자.
"시므이"
시므이는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사울 왕의 친족 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친족인 사울 가문이 다윗 때문에 왕권(王權)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평소부터 다윗을 미워했다.
시므이가 저주 한 이유는?
(시므이가 저주 한 이유도 타당성 있어 보인다. 적어도 자신은 확신했기 때문에 죽을 것이라는 각오를 가지고 다윗을 저주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다윗의 탓으로 돌렸다.
기브온 사람들에게 사울의 아들 7명을 넘겨 준 것. 그래서 그는 다윗의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하나님의 벌로 확신) 했다.
시므이는 여기서 다윗 왕이 과거 이스보셋과 아브넬을 죽인 장본인이며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사울가의 몰락의 책임이 바로 다윗에게 있다고 믿으면서 돌을 던졌다.
이것이 맞을까? 아니다.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전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줬다(9: 9,10). 따라서 시므이의 이 같은 행위는 그릇된 자기 선입견(先入見)의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삼년 연속 기근이 들자 다윗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이 재앙이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 때문이라는 말씀을 하셨고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다가 그들의 요청대로 사울의 아들 7명을 넘겨 주는데 이것은 다윗이 시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시므이는 사울의 왕권을 폐하고 다윗의 왕권을 일으켜 세운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편협한 선입견과 혈연주의에 빠져 다윗을 저주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런 시므이의 잘못된 확신과 모욕적인 언행에도 다윗은 침착했고 평정을 지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윗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윗이 그렇겔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다윗은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히로다"라는 백성들의 칭송 때문에 사울 왕으로부터 겪어야 했던 수많은 억울한 일들을 겪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고난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다.
우린 쉽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하면 고난을 당하지 않을지를 고민한다. 쉽게 쉽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고난이 오면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받으면 쉽게 끝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결론이다. 고난이 올 때 피하지 말고 온전히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믿고(훈련시키기 위한 것으로 믿고) 받으면 오히려 쉽게 끝난다. 문제는 이리저리 핑계 대고 피하면 그 고난은 길어진다는 것이다.
다윗의 이런 점을 부러워하면서도 우리가 못하는 것은 고난을 두려워하고 아예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 때문이다.
두 번째로 다윗이 이런 굴욕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는 시므이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만일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면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 보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시므이를 처단하기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시므이의 그런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11)
주께서 그렇게 뜻하셨으니 반드시 견뎌야 마땅하다. 주께서는 정의로우며 유익한 일 이외에는 어떠한 일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of God)를 믿는 자세이다.
섭리란 사람들의 삶에 나타나는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통치를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 요셉이었다
요셉이 형들의 배신을 계속해서 마음에 두었더라면, 절대로 그들을 향하여 형제 다운 애정을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 불의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 형들을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었고, 심지어 그들을 위로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주는 위로가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그의 권세로 붙잡고 계시고 그의 뜻대로 다스리시고 지혜로 주관하시므로 그의 결정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위로가 된다.
만물의 주관자 이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것도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서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이 때문에 우리가 확신에 찬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 (시 118:6)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오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시 27:1)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지한 것이 가장 큰 비참함이요, 또한 최고의 행복은 바로 그 섭리를 아는 데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 우리 주위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길 바란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는 사람들
그들에겐 주위의 모든 것들이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언제 병들지, 언제 지진이 날지, 친구가 나를 속이지 않을까, 강도를 만나지 않을까 등)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해 곧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움과 공포에 쌓여있다. 진정한 안식이 없다.
예전에 우리의 모습이 이랬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던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알게 하시고 믿게 하셨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잘못된 자기 확신에 빠져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13절에서 먼지를 날리더라 - 여기서 '먼지를 날리다'라는 말은 '먼지를 일으키다'라는 뜻이다(공동 번역). 즉 시므이는 다윗에 앞서 행하면서 다윗을 모독하는 의미로 짐짓 그 앞길에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흙먼지는 다윗은 물론 시므이 그 자신의 머리 위에도 덮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 우리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 역시 흙먼지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즉 그것은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가 합당치 아니한 것일 때 그 저주는 도리어 저주를 발했던 시므이에게로 되돌아갈 뿐이란 사실이다
시므이는 훗날 압살롬의 반란이 수습되자 다윗 왕을 찾아와 이와 같은 과거의 망령된 행실을 시인하고 다윗의 용서를 받긴 하였다(19:16-23). 하지만 그는 결국 솔로몬 왕 때에 왕명을 어겨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왕상 2:36-46). 하나님이 결국에는 시므이를 심판하셨다.
혹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상처를 받을 때라도,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고통만 더 악화되고 우리의 마음에 복수할 생각만 일어날 뿐이다.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어떠한 원수가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인도하심에 따라 허락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요한 알베르트 뱅겔이라는 신학자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라고 했다.
다윗과 같이 모욕 받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만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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