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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본질 - 히브리서 1장 1-2절

차작가 2023. 11. 16. 11:58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좋은 간증을 얻었다. 좋은 모범을 보여 주었다)

도입: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다. 그렇다면 확실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게 없다.

신념과 믿음의 차이:

신념은 내가 무엇을 믿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잘못 알고 엉터리로 믿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닐 수 있고 진리라고 믿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다. 이것이 자기를 믿는 것이고 신념인 것이다.

반면에,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수술실의 환자가 의사에게 완전히 맡기는 것과 같다. 술 취한 사람이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맡기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한 것은 의인은 자기 신념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맡김으로 산다는 의미이다.

11장의 믿음의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의인들을 말함으로써 믿음이 과연 신자를 어떤 삶으로 인도하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한 것과 연결하여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11장에서 인간에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둬야 한다. 즉 믿음이 우리를 어떤 삶으로 이끄는가에 관심을 두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현대 교회가 말하고 있는 믿음이 어떤 면에서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11장 첫 구절에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시작한다.

본론:

1. 바라는 것들의 실상

바라는 것 :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라는 것은 우리의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천국, 영생, 어떤 것이 진짜 복인지 등)을 말한다. (아빠가 무엇을 사 준다는 약속을 받은 아이는 바라는 것이 실제로 이뤄질 것을 확신한다.)

실상 => 확신

따라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한 확신’하는 것이다. (천국에 대한 확신, 영생에 대한 확신, 진짜 복에 대한 확신 등)

믿음은 미래를 현재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 예로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가야 할 길과 아브라함의 앞일에 대한 모든 계획을 알려주고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창 1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은 다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하셨다. 보인 땅이 아니라 보여 줄 땅이라는 것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모른 채 떠났음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였다. 즉 젊은 때가 아니라 힘을 쓰지 못할 늙었을 때 지시를 받았다. 그는 모든 생각을 접어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떠나지만 그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떠났다. 이것이 믿음이 이끄는 세계이다. 현재 상황은 어떤지는 상관없이 미래에 주어질 것을 현재의 일처럼 확신하고 나가는 것이 믿음이다.

12: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 섰을 때에야 비로소 그 땅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정착된 삶을 살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약속을 바라보는 삶, 이것이 믿음의 삶이다.

요셉: 본문을 다시 보면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셨으며”(22절)라고 말한다.

창세기 50:24-25절에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요셉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들어갈 것을 유언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미 죽어 해골이 되었는데 해골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어디에 묻혀 있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그냥 땅이 아니라 생명이었다. 땅이 생명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이다. 요셉은 국무총리이든 뭐든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임을 믿었다. 이러한 요셉에게 국무총리라는 세상적 지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워진 역할이었을 뿐이다.

믿음은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거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므로 세상의 영화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지위에 있든 그 모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자리며, 자신은 다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아 사용되는 일꾼인 것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그것을 힘으로 이용하여 타인을 다스리려고 하지 않게 된다.

이처럼 바라는 것들은 우리의 막연한 소원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으로 천국과 영생을 말한다. 천국과 영생은 우리가 만들어 낸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주도 하신 것이다.

이 축복에 대한 확신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2.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보이지 않는 것들: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노아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다가올 심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거주할 땅, 요셉에겐 출애굽, 모세에겐 하나님)이다.

증거:

증거하는 것

즉,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명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는 레이다이다. (레이다도 내가 만든 게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보게 하신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다가올 심판 => 노아는 보았다. 미래도시 => 아브라함은 보았다. 출애굽 => 요셉은 보았다. 하나님 => 모세는 보았다)을 보게 만든다’

그 예로 이스라엘 조상 중에

노아:

노아는 온 땅에 홍수가 임할 것이니 방주를 예비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다. 온 세상을 뒤덮는 홍수는 과거에 없었고 노아의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경외심을 가지고 방주를 지었다. 세상 사람들은 조롱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수는 일어났고 조롱했던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홍수 사건이 노아가 옳았다는 것을 증거해 주었다.

모세: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그런데 믿음이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게 한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음이 볼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실체를 보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강하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야 말로 신자에게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하는 강한 힘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간다 할지라도 나를 해롭게 하지 않으시고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함께 하심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게 된다.

다니엘의 세 친구:

느부갓네살이 만든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어김으로서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다. 그때 느부갓네살이 신상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세 친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건져줄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설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절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풀무불에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못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이다. 즉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여기는 믿음의 모습이다.

3.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로써: 1절의 믿음의 본질 면에서라는 뜻이다.

증거를 얻었느니라: 하나님이 증거해 주시는 도장을 받았다. ‘너희는 믿음으로 살았다’라는 도장을 찍어 주셨다.

선진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증거를 얻었다. 선진들이 바라면서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선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었다.

선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는 어떤 증거물이 있었을까? 무슨 증명을 얻은 것이 있었나?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다.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어떤 증거물을 보이심으로써 믿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 다만 믿음이 선진들에게는 약속의 증거물이었고, 믿음에 의해 약속을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보는 자처럼 살았다.

결론:

연극 의사 제임스 심슨은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신 다음에 그의 갈비뼈를 뽑아 하와를 만드셨다는 성경 말씀을 읽고 그것이 고통 없이 환자를 수술할 수 있는 방법임을 암시해 주시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 믿음으로 그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 클로로포름이라는 약품을 마취제로 사용해 환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수술 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의 해군 장교 매튜 모리는 성경을 읽다가 해로가 있다는(시 8:8) 말씀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바다의 길을 찾는 작업에 들어가 마침내 인류 최초로 해양지도를 작성해 해양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믿어야만 삶을 유지 할 수 있도록 디자인돼 있는 생명체이다. 이런 까닭에 사람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생애가 결정된다. 도둑질로 잘 살 수 있다고 믿으면 도둑이 되고, 불쌍한 사람에게 의료 혜택을 줘야 한다고 믿으면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사람이 된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살면 이것이야 말로 최대의 축복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확신으로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