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사람의 한계이다. 이런 한계로 인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증거 삼아 사람을 판단하기를 즐겨 한다. 즉 누군가의 믿음의 여부를 그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기 쉽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실체는 인간에 의해 얼마든지 가공되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교회에서 믿음의 증거로 강조하는 구제, 봉사, 기도 등등의 모든 행위들이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말씀한 대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하나님 약속들에 대한 확신)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보게 하는 레이다)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나타난 것을 가지고 믿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즉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존재하기에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이미 갖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증거가 있다면 그에게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확실한 실체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믿음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실상과 증거로 주어진 믿음이 있는 자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11장의 내용이고, 이런 면에서 11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믿음의 위대성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소개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믿음이 어떻게 일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럴 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을 본받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를 보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신자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아부어야 한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낸 믿음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로써 천국 가는 것은 아니다. 참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살았던 인물들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본론:
본문은 아벨에 대해 말하고 있다.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1. 더 나은 제사를 드리고: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
본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별을 두고 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고 더 나은 제사라고 말하느냐는 점이다. 제사라는 의식에 있어서의 차이일까? 아니면 제물의 종류의 차이일까?
본문에서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 증거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예물의 차이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종류의 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창세기 4:2-7절을 통해서 살펴 봐야 한다.
A. 잘못된 해석
1. 2절: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하나님은 농부 보다 목축업자를 더 좋아하시는 가 보다라고 생각하지 말자.
2. 드린 제물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서?
3절: ‘가인은 땅의 소산(열매, 곡물-some of the fruits of the soil)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절: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피의 제사가 아닌 곡물로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레 2장에 소제(grain offering)에 관한 규례가 있다.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 지니라 2:14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 돼’
제물의 여부에 따라 하나님이 받고 안 받으신 게 아니었다.
B.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신 이유는 => 7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으시자 가인은 심히 분해했고 그의 안색마저 변했다. 그러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이 가인의 제물을 연납 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
7절을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어구가 있다. 그런데 70인 역 (LXX)에 보면 그 ’선을 행하다’ ‘야타브’라는 동사가 ‘예물을 올바로 바치다, 제물을 올바로 바치다, 올바른 제사를 올리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다. 그래서 70인 역은 창세기 4장 7절을 ‘네가 제물을 올바로 바쳤다면(올바른 제사를 드렸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올바로 제물을 바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 가인이 ‘하나님 왜 내 제사는 기뻐 받지 않았을까? ‘ 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제물을 올바로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야(제사를 올바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고 대답을 하셨다.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선을 행하는 일과 아름답고 유익한 일은 올바로 제물을 바치는 일, 즉 올바른 예배의 삶을 사는 것과 정확하게 동의어로 인식이 되고 있다. 그러니까 7절의 ’네가 선을 행하면‘이라는 어구는 말 그대로 ’네가 선을 행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일을 행하면’이라는 뜻과 ‘네가 올바른 제물을 드리면, 즉 올바로 예배를 하면’이라는 말을 동시에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어구이다. 그러니까 이 어구는 ‘제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배’의 이야기이다.
정리를 하면, 하나님께서 ‘왜 내 제물을 받지 않으십니까?’라고 묻는 가인에게
‘네가 올바로 드린 제물을 통해서 올바른 예배를 하면, 다시 말해 네가 선을 행하고 옳은 일을 하면 왜 내가 받지 너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겠느냐?’라고 대답을 하신 것이다.
그럼, 올바로 드린 제물을 통한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자.
C. 올바른 예배란? 히 11:4 (성경으로 해석하자)
히 11:4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히브리서 본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별을 두고 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고 더 나은 제사라고 말하느냐는 것이다. 제물의 종류의 차이가 아니면, 그럼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다시 창세기 본문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이었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린 것으로 되어 있다.
레 3:16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찌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레 27:26 “오직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 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서 본 것처럼 첫 새끼와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즉 가인은 단지 자기 소산을 제물로 드린 것이지만 아벨은 자기 소산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제물을 통해 고백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에 대해 증거 한다는 것은 아벨이 바친 양을 증거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통해 나타난 아벨의 구별 의식을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구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자신의 소산을 바치는 가인의 제물은 단지 바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 즉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며 받으실 것이라는 수준이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중점을 뒀다. 마치 현대 교인들이 바치는 행위에 중점을 두면서 제물에 신경을 쓰는 것, 다시 말해서 많이 바치고 정성스럽게 바치고 좋은 것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가인의 수준이었다.
하나님은 예물이 마음에 들어서 아벨의 것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달랐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인은 바치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수준이라면, 아벨은 자신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한 여호와의 것이라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이 차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기뻐하셨고 가인의 제물은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 차이가 바로 올바로 드린 예물을 통한 올바른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결론:
십일조 헌금에 대한 아벨과 같은 관점은 ‘하나님이 주신 것 일부를 다시 하나님께 구별하여 돌려 드립니다’이고 반면에 가인의 관점은 ‘십일조를 드렸으니 이젠 됐죠? 저 하나님의 돈 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을 주세요!’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자세로 드렸다면 하나님은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주일 예배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벨과 같은 생각으로 드리는 예배는 어떤 것일까? 모든 날이 주님께서 주신 날이므로 잘 누리고 잘 살았으니 이제 한날을 주님을 생각하며 구별하여 내 모든 걸 그만두고 오직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오늘 이 주일을 오직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벨이 드린 믿음으로 드린 예배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다.
(믿음 때문에) 죽었지만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본문 하반절을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한다. 죽은 자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행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이 있다. 아벨은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즉 아벨로 하여금 첫 새끼와 기름을 구별하여 제물로 바치게 했던 그 믿음이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아벨에게 있던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이며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여호와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나조차도 여호와의 것이니 내가 여호와께 따로 바칠 것은 없고 다만 여호와가 나를 쓰실 뿐이다. 이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 순종하게 된다.
반면에 이 믿음이 아니라면 ‘바치면 복 주시겠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 내 것을 바쳤으니 그 대가로 복을 주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렸을 뿐인데 그 대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에서 떠나있는 것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행위를 기준하여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구별 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한다. 나의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떠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신자의 삶은 분명 믿음이 없는 사람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이며 믿음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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