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미가 6장 6~8절

차작가 2023. 11. 16. 11:57

 

도입:

미가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에 살면서 유다를 향해 예언한 이사야와 북부 왕국인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한 요나, 아모스, 호세아 등과 더불어 BC. 8세기경에 예언을 했다. 특히 요담(BC. 740-731)과 아하스(BC. 732-715), 히스기야(BC. 716-686) 시대에 예언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가의 예언 시기는 최소한 사마리아가 앗수르에게 함락된 해인 BC. 722년 이전이다. 아마도 사마리아가 함락되기 최소한 10년 전에 사역을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이렇게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 이스라엘은 큰 시련을 겪었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하기 직전이었고, 남쪽 유다 역시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그러한 고통을 겪는 것이 하나님이 불의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결국 이스라엘의 고통은 그들의 죄의 결과였다.

그런데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대개 어떤 생각을 할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자신의 정성과 믿음을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증명하고자 한다.

이처럼 제물로 자기 믿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자연히 제물의 가치에 있게 된다. 제물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일수록 믿음과 정성이 큰 것으로 증거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최고의 정성을 담은 제물로 맏아들을 바치기도 했다. 사람에게 맏아들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

따라서 맏아들을 제물 삼아 신을 경배 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제물을 가지고 신을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최고의 정성이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세상의 생각이고 신에 대한 시각이었다. 이스라엘이 허물과 자기의 죄를 위해 맏아들을 바치고 몸의 열매를 들고 하나님을 찾았다. 몸의 열매란 아마 육신의 고행이나, 고생을 자처한 신앙적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육신의 고행, 또는 고생을 자처한 신앙적 행동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의 정성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번제물로 일여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나아가,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바친다고 해도 그것으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보시고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교회는 하나님을 인간이 바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그에 따라 상과 복도 다르게 주시는 분으로 말한다. 이것이야 말로 교회를 향한 인간의 욕망에 의해 왜곡된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 신자에게서 그 영혼의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돈을 보기 때문에 그 같은 가짜 하나님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 성경을 펼치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목사의 말만 의지하면서 인간의 욕망에 꾀 맞춰진 하나님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의 말에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면서 그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의 정성을 제물을 도구 삼아 드러내고자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죄와 허물에 대한 징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인간의 욕망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종교의 시각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본문 8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8절)

본론:

I. <공의를 행하며> 정의를 행하라

act justly -be fair in their dealings with others 다른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다. (공의의 반대가 불의임)

왜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 당시 사회가 공의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2:1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2: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2:8 근래에 내 백성이 원수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에서 겉옷을 벗기며 2:9 내 백성의 부녀들을 그들의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

3: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정의를 모른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외적으로는 이같이 번영을 했으나 내적으로는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극도로 문란하고 불의가 횡행하였다. 선지자 미가는 바로 이러한 풍조 중에서도 특히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 선지자적인 예언을 했다. 따라서 호세아서와 미가서는 어떤 의미에서 보았을 때는 구약에 나타난 사회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캐나다 리전트 칼리지의 브루스 왈키(Bruce Waltke) 교수는 공의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자와 못한 자를 돌보고 억압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단순히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살면서 공의를 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땅콩 리턴 사건에서 보면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함부로 대하는 것이 불의이고 공의를 행하지 않는 것. 소위 가진 사람들의 횡포가 요즘 매스컴에서 회자되고 있는 것. 백화점 직원의 뺨을 때리고 주자 요원을 무릎 꿇게 하는 것등)

가진 자가 더 없는 자를 위해 생각할 줄 아는 것이 공의다.

성도가 공의를 행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악한 법과 제도를 선하게 고치는 개혁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영국에 노예제도가 있었을 때 예수님 믿고 난 후 이 노예 제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앞장서서 운동하였고, 결국 영국의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질서(섬김-아담의 역할=> 창조물을 잘 관리하고 섬기는 것. 땅을 정복하라는 말은 섬기라는 것)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타락한 사회에서 공의를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희생의 삶을 살라는 뜻과 같다. 공의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희생을 생각해야 한다.

II. <인자를 사랑하며>

“자비” “인자” “선대(善待)” “은총”이라고 번역되곤 하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사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이다. 헬라어로 본다면 “아가페”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헤세드”의 사랑은 크게 세 가지 용례를 갖고 있다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

셋째,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성경은 이 세 용례들을 각각 보여 주는데, 시편 136편 1절에서 26절까지의 경우에는 매절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인자”로 번역된 단어가 “헤세드”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헤세드)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헤세드”로 표현하고 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확고한 사랑이 헤세드이다.

호세아 6장 6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을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헤세드”의 사랑을 다시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헤세드의 사랑이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사랑하는 것을 요구하신다. 무자비하고 무정하고 사랑을 버린 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증거라고 생각 할 수 있다.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헤세드”의 사랑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자신들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헤세드”의 사랑을 베풀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보아스)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헤세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룻 2:20).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헤세드)을 베풀리라”(삼하 9:1).

“헤세드”의 대상이 누구이며, 방법이 무엇이든지 공통점은 “자기 희생”이다.

2011년 12월 24일 자 중앙일보에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아이다호 주에 사는 제니 레이크라는 여성이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뇌종양 3기였다. 그런데 동시에 그녀는 홀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녀와 남자친구 네이던 휘트먼은 고민에 빠졌다. 뇌종양 치료를 위해 항암치료를 받아야 할지, 아니면 뱃속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치료를 거부해야 할지였다. 만약 아기를 살리기 위해 항암치료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눈 앞에 다가온 죽음을 피할 길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고, 항암 치료를 받을 경우에 뱃속의 아기는 당연히 유산해야 했다.

제니는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아홉 달 동안 몸속의 암과 사투를 벌인 끝에 건강한 아들 채드를 낳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해냈어. 내 할 일을 한 거야. 아기만 안전하면 난 괜찮아.” 제니는 채드를 낳은 지 12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아들 채드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전혀 모른 채 현재 아이다호(Idaho) 주의 포카텔로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라고 있다.

제니 레이크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희생의 사랑처럼,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바로 “희생의 사랑”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이보다 덜하지 않다.

III.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walk) 것>

함께 걸어 가는 것 => 동행 =>겸손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동행하는 것이다.

날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걸어 가는 것이다. It is the daily walk in relationship with God (주일만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주는 말-날마다 하나님과 동행 – 경건)

동행의 예) 노아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다. 방주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큰 방주를 짓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시일이 정해지지 않는 작업이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상태에서 방주를 짓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창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실제로 하나님이 모습을 드러내셔서 노아와 동행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동행이란 단지 몸과 몸이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몸과 몸이 함께 한다고 해도 마음이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이미 결별된 상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결국 동행이란 몸과 몸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함께 하는 동행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헤세드)를 입었더라 .

노아에 대한 의와 완전함의 평가는 그의 행동을 기준한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은혜의 결과였다. 즉 은혜를 입은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노아의 행동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삶이 노아에게서 볼 수 있는 의며 완전함이었다.

이처럼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노아였기에 그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방향은 과연 어디인가? 노아처럼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그 마음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아인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겠나? 그러나 노아는 묵묵히 방주를 만드는 삶을 그치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날 때까지의 노아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은 삶이었다.

함께 동행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이고 계속해서 지도 편달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데 순종하지 않고 걸어 갈 수 있겠나? 공의를 행하지 않고 인자를 사랑하지 않고서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것이 바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결론:

매주 형식적으로 예배 드리러 온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이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까 보다는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가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