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하나님 약속에 대한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하는 레이더이다.
믿음은 가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소망하면서 그 세계는 가치를 알게 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이 과연 믿음이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아벨: 구별된 믿음. 에녹: 하나님이 계신 것을 굳게 믿고 동행하는 믿음
노아: 오늘 본문에서 노아를 어떻게 정의하나?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 창 6: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6: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 장차 있을 홍수 심판을 뜻한다.
그러면 노아는 그렇게 모두가 하나님을 등지고 그분의 말씀을 우습게 여길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심판의 날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 노아는 날 때부터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었을까? 그 확실한 답이 창 6:8 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오직 ‘은혜에 의해서’이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뭔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심판의 날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아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그 저주의 심판 속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다.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했으면 그 저주의 물속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똑같은 죄인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자 그가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자가 되었다.
창세기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 으며
8절에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진술을 하고 바로 노아는 그 은혜에 의해 의인이 되었다고 9절이 받고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게 되는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창세기 기자인 모세는 여기서 피력하고 있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던 자들이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노아는 홍수 후에도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추태를 부렸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완전한 자라 부르셨다. 노아는 산 위에 커다란 배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의견이나 꾀를 내놓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다른 이들의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을 ‘완전한 자’라 부르셨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은 우리의 힘으로 생산해 내는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약한 자로 자기를 부인하는 상태를 말한다.
세상이 온통 쓰레기처럼 더럽게 패괴하고 강포하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부은 어떤 자들을 구별해서 건져 내시는 것을 가리켜 ‘의’라 하고, ‘거룩’이라 하는 것이며 ‘완전한 자’라 하는 것이다. ‘의’나 ‘거룩’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 구별하셔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별시켜서 노아처럼 당세에 완전한 자로 여겨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미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방주를 만들었다.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은혜를 입은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자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을 했다.
이 말을 히브리서에서는 경외함으로 (fearing god)-두려움과 존경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고,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그대로 믿었다. 그리고 경고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한 삶을 살았다.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믿는다는 말은 하면서도 방주를 예비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증거일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경고는 실제적인 일이었다. 비록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그 어떤 증거도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노아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판이 임할 증거가 보이지 않기에 심판에 대해 의심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과 증거를 떠나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 자체가 노아에게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떨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세대에도 노아의 홍수 때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경고의 메시지를 똑같이 주셨다. 아니 더 무시무시한 경고를 주셨다.
(벧후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계 20: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 경고의 메시지에 어떻게 반응을 했나?
(벧후3:3-5)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조롱거리로 삼았다. 정말 그렇다면 왜 지금 아무런 징조가 안 보이냐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벧후3:6-9)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지금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기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지금 이 회개의 기간 동안에 얼른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에 올라타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불타는 종말을 눈으로 보는 자들이 바로 성도이며 그 종말을 보는 자들로서 그 종말을 준비하는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믿음으로 방주를 짓는 자들이고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아직도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지만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로, 완전한 의인으로 간주해 주셨다.
따라서,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경고를 현실로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노아처럼 방주를 예비하는 삶을 살게 한다. 지금의 성도가 방주를 예비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이다. 방주를 예비하는 삶이라고 해서, 특별히 해야 하는 삶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성도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귀하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는 능력이 된 따라서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노아와 같은 심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것은 자연히 세상을 향한 정죄가 되었다.
7절에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라는 말을 하고 있다.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의 삶이 세상을 정죄하는 외침이 되었다는 것이다. 노아가 세상을 향해 ‘너희는 심판을 받고 망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의 행위가 세상을 향한 정죄의 외침이 된 것이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믿지 않으니 결국 심판에서 건짐 받지 못할 것이다’는 외침이 노아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보면서 하나님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오직 노아와 같은 믿음이 있는 자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도도 세상을 향한 소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묵묵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정죄의 소리가 된다. (지금 한국교회가 기독교라는 말까지 듣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묵묵히 십자가 붙들고 말씀 따라가는 것이 세상을 향한 정죄의 소리가 된다) 이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다.
심판을 믿지 않는 세상은 방주를 예비하는 노아의 삶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겼다. 더군다나 바닷가에서 방주를 짓지 않고 육지에서 짓는 것을 볼 때 어떻게 평했겠나? 정말 미련한 짓처럼 보였을 것이다. 노아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믿는 것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긴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심판이 없다면 모두 헛된 일로 끝난다. 십자가, 부활, 승천 이 모두가 세상의 멸망이 없다면 쓸데없는 것에 불과하다. 심판을 보지 않기에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다. 예수님이 없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방주 없이도 세상을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경고가 눈에 보이는 현실로 드러날 때 참으로 지혜 있는 자가 누구인가가 증거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믿고 그 일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가 진심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노아처럼 세상이 바보라고, 어리석다고 조롱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다. 노아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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