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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 히브리서 11장 13-16절

차작가 2023. 11. 19. 12:45

도입:

믿음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장차 가야 할 본향을 사모하게 되어있다.

믿음에 대한 보편적인 오해는 성도가 믿음을 소유하여 그 믿음의 힘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실천하고, 하나님은 나의 행위를 보시고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이다.

믿음은 인간의 행위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믿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믿음에서 인간은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은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열심의 결과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믿음이다.

본론:

16절을 보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믿음을 인간의 소유적인 측면에서 이 내용을 본다면 어떤 식의 해석이 될까? 당연 믿음이 있는 성도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더니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기뻐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아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아버지는 ‘내가 저 아이의 아버지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성도가 믿음으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기에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성도로 살자고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초점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믿음 있는 자로 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이 모두 믿음에 대한 오해의 결과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그네임을 믿으며 세상을 소망하기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산다고 하자.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 스스로 그런 믿음을 창출했을까? 우리의 의지며 열심이며 각오일까?

사람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세상에서 떠날 수 없다. 본향은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외면할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본향을 사모한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그다음부터는 내가 믿음으로 본향을 사모하며 살 수 있을까? 즉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대로 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다고 해서 내 안의 악한 본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해도 여전히 세상의 유혹에 휩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데,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줬으니 이제부터 그 믿음으로 신앙생활 잘해라’고 하셨을까?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은 믿음을 주신 후에 아무것도 하실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쉬지 않고 일하신다.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증거하시기 위해 자기 백성을 믿음의 세계로 불러들이시고 날마다 믿음으로 그들을 붙드시며 본향을 사모하며 살게 하신다. 결국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본향을 사모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책임 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이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과에 대한 공로를 모두 우리에게 돌리시는 것이다. 이것이 본향을 사모하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신다는 말의 의미이다.

실력자는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이것을 안다면 아무것도 못한 우리를 높여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뿐이지 ‘내 믿음’이라고 자신을 높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착각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인간의 믿음을 칭찬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참으로 다루기 힘든 완악한 인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붙드시면서 일하지 않았는데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말할 때 믿음을 가진 자로 뭘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믿음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대한 반응이고 진심으로 믿음에 붙들려 사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지키고 반응한 결과가 본향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본향을 생각한 증거:

1. 본토를 떠나는 것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시자마자 아브라함이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생존의 근거였던 땅을 가차 없이 버리게 하셨다.

그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세상의 삶의 원리인 물질주의에서 속히 떠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의 힘들은 한시적이며 임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르심을 입은 이들에게 더 나은 진짜 고향 땅이 있음을 믿음을 통하여 알리시고 한시적이며 임시적인 이 세상에서 떠나 부유(浮遊) 하는 자처럼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게 하신다.

(히 11:9~10)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나 평생을 천막 속에서 지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이리저리 옮겨가며 살았다. 그 말은 성도는 이 땅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장막으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는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진짜 우리의 본향(本鄕)을 믿음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히 11:15-16)

11: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썩은 사과를 들고 그게 가장 소중한 것처럼 애지중지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그 썩은 사과를 버리게 할 수 있는 길은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사과를 쥐여주면 되는 것처럼 이 세상 것들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의 힘을 꼭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가 믿음 안에서 인식이 될 때 이 세상 것들을 자연스럽게 놓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 안에서 천국을 본 이 들은 이 세상 것들을 모두 팔아 그 천국을 산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마 13:44)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의 소중함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에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천국 소망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천국의 소중함을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은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땅의 것들을 계속 구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영생과 이 세상의 힘 사이에서 단호하게 영생을 택하지 못하고 어물쩍하다가 결국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좇게 되는 것이다.

(마 19:21~22)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잘 지켰다고 하는 부자 청년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영생의 떡인 당신을 좇아오라고 하시자 그 부자 청년은 재물과 영생 사이에서 고민하고 근심하다가 결국 영생의 예수님을 떠나가는 장면이다. 마태복음 13장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귀한 보화를 사는 사람과 완전히 반대의 모습이다. 이렇게 본토가 의미하는 물질주의에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물질의 매력에 홀려 주님을 떠나가게 될 수 있다.

(마 13:22)

13: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절대 말씀 속에서 성장해 나갈 수가 없다. 그러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말씀을 막아버리는 악한 담과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4:33)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은 예수를 믿으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거지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소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 필요한 비용(expense)에 불과한 것임을 알고 그 소유를 목적으로 살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세상 힘의 소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가난하다고 기죽을 이유도 없고 부자라고 교만해서도 안 된다. 그러한 소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본토를 떠나는 것이다.

 

2.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1) 재산이 많음:

재산 형성: 창 12: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12: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재산이 늘어남 - 13:1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13:2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롯을 위해 많은 재산 사용했다. 318명 용사 비용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

2) 롯과 다투지도 않음 :

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의 건전한 물질관은 하나님에게 우선순위를 둔 그의 신앙 자세에서 잘 드러난다. 조카 롯과의 분가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선택의 기득권을 포기한 것은 그의 건전한 물질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외형적인 부의 추구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 곧 하나님 우선의 신앙을 앞세운 가치관의 발로이다.

3) 롯을 구출한 다음에 소돔 왕의 제안 거절한 것:

아브라함은 롯과 그의 가족이 전쟁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그를 구하기 위하여 사병들을 동원하여 구출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로 롯과 그의 가족은 물론 포로로 잡혀가던 소돔 사람들과 그들의 재산 모두를 되찾아오게 되었다. 승전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이한 소돔 왕은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가져가라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제안을 거절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네 말에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 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 14:23)

소돔 왕의 제안을 아브라함이 단호하게 거부한 이유는 하나님만이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나님 이외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복을 대신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패망의 구덩이에서 가까스로 구출을 받은 터라 모든 재물을 다 가져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난 다음 소돔 왕은 아브라함의 부요하게 됨이 자신의 재산을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곡해시킬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 점을 미리 내다본 것이다.

3. 스스로 나그네로 여겼다.

(창 23:2~7)

23: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23: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23: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23:5 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23: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사라가 헤브론 땅에서 죽자 아브라함이 헷 사람들에게 가서 아내를 매장할 매장지를 좀 팔라고 말을 했다. 그때 아브라함이 자신을 어떻게 지칭하는지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 불렀다. 자신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았다는 말이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다 이 땅을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다가 갔습니다.(히 11:13)

 

그렇게 이 땅에서 외국인이요 나그네요 떠돌이로 살기로 선택을 한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되는지 보자. 다시 창세기 23장으로 가서 6절을 보면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 부른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생애와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보니 아브라함은 자신들의 땅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더라는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봤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복이었다.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행 7:5)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풍성히 받은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생애와 존재와 인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나타난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땅이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본향을 생각한 건 아니다.

이런 믿음이 처음부터 생겼을까? 아니다. 처음엔 하란 땅처럼 좋은 땅일 걸로 기대하며 떠났지만 그동안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생각할 때 점점 그 생각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끈질긴 인도하심 때문이다. 결국 이런 인생을 살면서 인도함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을 나그네요 순례자로 살아야 한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이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됨을 어떻게 보였나?

그들은 모두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았고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확실히 알고 그 본향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감으로 세상과의 구별을 보였다.(히 11:13-16) 그 아래로 우리의 이름이 보여야 한다. 우리도 바로 그 믿음의 선진들의 이름을 좇아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빌 3:18-20)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인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이다. 그런데도 성도가 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부자 되고 병 안 걸리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아야 할까?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만 좇아 나그네로, 순례자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산제사이며,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베드로의 고백

하늘의 본향, 즉 진정한 우리의 목적지를 안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베드로도 성도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벧전1:1-2)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을 배우게 되는 사람들인데,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나그네로 살게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라 불렀다.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보면,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결론:

잘 사는 인생은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하숙생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는 거다.

이것이 정답이다. 잘 사는 인생은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하숙생처럼 이 땅을 누리고 즐기면서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살다가 천국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