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믿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대개 믿음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이라는 힘을 주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믿음이 주어진 이후에는 믿음의 주체가 내가 된다. 즉 일단 믿음이 주어지면 그다음부터 믿음을 책임지고 지키고 관리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으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믿음의 행위라는 것에 초점을 둔다. 믿음의 행위가 있는 자신을 봄으로써 자신의 믿음에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자. 믿음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믿음이 있는 내가 순종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선물하신 믿음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간 결과일까? 믿음이 있는 나의 순종으로 본다면 결국 말씀에 반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믿음의 행위라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다. 행위가 곧 말씀에 반응하는 흔적이고 증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대다수의 교회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믿음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그 순종을 나의 반응으로 볼 수는 없다. 믿음이 나를 이끌고 있다면 이미 나라는 존재는 믿음 안에 죽고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기에 나의 행위 또한 말할 수 없다. 말한다면 믿음의 열매라는 차원에서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럼 나는 뭐냐?’는 것이다.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간다면 나는 아무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조종 받는 로봇과 같은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을 오해한 결과이다. 믿음이 나를 붙들어 이끌어 간다는 것은, 가지 않으려는 나를 강제로 이끌어 간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나의 모든 생각과 사고와 소망을 새롭게 함으로써 말씀을 따르게 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새롭게 된 나를 이미 ‘나’가 아니기에 나는 믿음 안에서 죽고 없게 됨을 말한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없이 11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결국 11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믿음이 그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그들이 말씀에 순종한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고, 또 그게 그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말일지 모르지만 믿음의 주체를 누구에게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본론:
본문은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이다. 아브라함 하면 떠오르는 것이 ‘믿음의 조상’일 정도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임을 굳게 세워주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의 주체를 아브라함에게 두게 된다면 결국 아브라함의 행위가 부각이 될 것이고 그러한 행위가 있는 아브라함 자체가 높임을 받게 될 위험이 있음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내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 예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보면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 설명:
1) 갈대아 우르르 떠날 때:
우상숭배 집안이었다. 하나님은 동시대에 욥이 살았는데 욥을 택하지 않고 아브람을 택하셨다.
2)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그 땅에 기근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곧 애굽으로 내려왔다 아마 아브라함은 복을 준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복은커녕 기근이 뭐냐고 투덜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뒤도 안 돌아보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 같다. 하나님은 분명 애굽으로 가라 하지 않으셨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람이 기근으로 그렇게 달랑 애굽으로 도망간 것도 가관인데 거기에 가서 자기 아내 때문에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 같으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다른 남자의 품으로 보냈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그랄 왕에게 또다시 사라를 팔아먹는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이 사라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였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오직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사라를 팔아먹는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 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실패하고 실수하며 가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시고 가르치시며 가나안으로, 모리아 산으로 끌고 가셨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되는데 아브라함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끌고 가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만들어 내신 것이다.
3) 하갈을 취할 때:
아브라함은 그렇게 ‘네 몸에서 날짜가 네 후사(後嗣)가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애굽 왕에게 자기 처를 팔았을 때 받았던 하갈이라는 애굽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13년간 그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리고 13년 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혼내주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온전 하라’하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너는 왜 전능자인 나 하나님의 말을 믿지 않고 네 마음대로 하느냐’는 질책(叱責)이다. 애굽에서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그러고는 또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비웃었다.
(창 17:17-18)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오 하고
이러한 아브라함의 인생을 개괄(槪括) 적으로 살펴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까? 여기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특별함이나 열심이나 성실함을 찾을 수 있을까?
정말 엉터리 같은 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계시는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열심만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열심을 찾아내야지 아브라함을 본받자고 나서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끝까지 인도하신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사람됨이나 인격이나 능력이나 노력을 근거로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홀로 지켜내시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믿음이 우리에게 먼저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와 계획과 언약 이 모든 것들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 믿음이 우리의 삶에 뚫고 들어와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하고 달래 시기도 하고 설득하시기도 하면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이란 말이 들어가면 더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읽을 때 믿음으로 앞에 ‘하나님이 주신’이란 말을 넣고 읽자.
우리는 내가 믿음을 가진 자로서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내가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 믿음에 붙들려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것은, 믿음을 받아서 그리고 소유해서 그 믿음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라는 의도가 아니다. 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는 세계로 집어넣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이다. 그럴 때 믿음은 나를 새롭게 하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우리는 다 같이 이러한 세계로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어떻게 살까?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어떻게 어떤 길로 이끌어 가는가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즉 믿음은 한 개인의 믿음의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세계란 무엇인가?
1) 믿음의 세계는 갈 바를 알지 못해도 가게 한다. (8절)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야 할 길과 아브라함의 앞일에 대한 모든 계획을 알려주고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창 1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은 다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만 하셨다. 지시한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이라는 것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모른 채 떠났음을 의미한다.
(당시 갈대아 지방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로서 이미 지금부터 4,000년 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를 떠나라 하셨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에게 거기보다 편하고 안전한 곳은 없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였다. 즉 젊은 때가 아니라 힘을 쓰지 못할 늙었을 때 지시를 받았다. 이러한 경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자신의 미래가 아닐까? 말씀대로 했을 때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모두 접어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집을 떠나는 것, 이것이 믿음이 이끄는 세계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가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데 떠나라는 말씀 하나에 모든 것을 버리게 하고 떠나게 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이다. 믿음이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이러한 믿음에 분명 반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를 고치면서 붙들어 가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에 붙들려 있는 삶,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믿음에 붙들려 있기에 다른 길로 가려고 발버둥 칠 때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길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구원이다.
우리 인간의 문제:
불확실한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검증되지 않은 것은 안 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낯선 곳은 가지 선뜻 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믿음이 주어지니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게 되니까 가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 믿음을 증명했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객관적인 믿음과 주관적인 믿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객관적 믿음이라 하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믿음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참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게 되는 것을 주관적 믿음이라 한다.
천국도 우리가 가보지 않아서 확신이 서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떠나라고 하신 친척과 아비 집도 마찬가지이다. 고대시대에 친척과 가족은 외부세력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어수단이었다. 나를 지키는 힘이었다. 그런데 그 친척과 가족을 떠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며 신앙의 여정을 가라는 의미였다.
본토 친척 집을 떠나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집을 버리고 떠나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 감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믿음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떠난 자로 살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나의 본토 나의 집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본토 나의 집이 있음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을 빙자해서 세상에 자신의 집을 탄탄하게 세우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의 소유는 없음을 알게 한다.
2) 믿음의 세계는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게 한다. (9절)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장막에 거했다. (9절)
간단히 말해서 남의 나라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을 나의 나라로 보지 않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향을 바라보며 나그네로 살게 한다. 믿음에 붙들린 신자라면 믿음에 의해 그러한 삶의 길을 가게 된다.
믿음은 신자를 편안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굳게 붙들어 놓기 위해 인도한다.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정착해서 집을 짓지 않고 나그네 삶을 살면서 텐트를 치고 살았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살지만 나그네 처럼 텐트를 치고 살아야 하는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땅에 있는 것들에 소망을 두지 말고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 본 것처럼 장차 영원히 거할 하늘나라만 소망하면서 살아야 한다. 믿음의 성도는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다. 이 땅에 살아도 이방의 나라에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보지 않고 낯선 곳을 오직 하나님 약속에 대한 확신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 더 큰 믿음의 전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순종하면 할 수록 믿음은 성장하게 된 것이다.
결론:
믿음이 선물로 주어질 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반응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순종해 갈 때 더 큰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지 않아서 어려움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하고, 믿음의 세계로 부름받은 무한한 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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