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
본문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아낌없이 바칠 것을 교훈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라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삭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점을 이해하려면 믿음에 대해 강조했던 내용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믿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지만 믿음을 받은 후부터는 내가 믿음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믿음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믿음에 대한 큰 오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믿음을 받은 후로는 믿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천을 해야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때문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는 내용을 볼 때도 아브라함이 믿음의 실천을 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주체는 나를 붙드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신자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믿음을 가진 자로서 믿음의 실천을 하며 산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믿음에 붙들려서 믿음에 의해 살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처럼 좋았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독자 이삭까지 아낌없이 바치도록 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바친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바칠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인가를 보라는 의미이다.
2. 첫 번째 살펴 볼 내용: 만들어 가시는 과정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도록 한 것은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붙들려 살았고 믿음에 의해서 이삭도 아낌없이 바치게 되었다. 우린 여기서 이삭을 바치게 한 믿음의 내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8-19절을 보면 “11: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분임을 믿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게 한 것은 하나님을 다시 살리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서 이삭의 죽음을 본 것이 아니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본 것이다.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의 죽음이 죽음이 아니었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까지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란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조차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믿음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셨다.
아브라함은 40여 년 이상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경험했다. 애굽 왕 바로 와 그럴 왕 아비멜렉까지도 벌벌 떨게 하시는 하나님, 도저히 불가능한 마른 막대기 같은 자기 부부에게서 새 생명을 탄생케 하신 하나님,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밀어 올리시는 하나님, 그렇게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내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된 아브라함은 이삭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 또한 실패치 않고 지켜질 것임을 알았다.
(창 17:19)
17:19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스마엘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이름까지 지어주셨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직접 그 약속의 자손 이삭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그런데 아직 장가도 못 간 이삭이 죽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기나긴 신앙의 여정 동안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 허심과 신실하심을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백세에 낳은 자식, 즉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는 참된 순종의 예배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지며, 그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항복하는 자로 성숙되고 지어져 가게 되는 것이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표지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모리아 산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아니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항복과 순종의 자리, 다른 말로 예배의 자리를 향해 성숙돼 가는 것이고 완성돼 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화이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도 없는 아브라함을 아들까지 바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게 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믿는 자신을 바라본다. 믿는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믿음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랑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믿음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봤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다. 그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바치는 자 되게 했다.
오늘 본문 17-19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려 내실 것임을 믿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정말 이삭을 죽이실 것으로 생각했던 같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 아들을 살려 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어구가 나온다. 거기서 ‘시험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닛싸’는 상대방을 잘못되게 하는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알아보다(test), 입증하다(prove)’라는 의미로 쓰인 단어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성숙되어져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하셨다. 그렇게 성도의 삶 또한 하나님의 시험으로 점철된다. 그렇게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시험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공히 주어지는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시험이었다.
(롬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다. 그 말은 아브라함이 간 그 믿음의 여정을 모든 믿는 자들이 공히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도 또한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나의 가장 소중한 것, 이삭을 바쳐내는 모리아 산의 시험대 위에 반드시 서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은 아브라함처럼 수시로 실수하고 넘어지는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모리아 산에 세우시고 그 시험에 넉넉히 합격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은 반드시 하나님 백성들의 순종의 행위를 도출하게 한다. 그래서 로마서가 4장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반면 야고보서는 이 사건을 행함과 믿음은 불가분의 관계 즉,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모순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약 2:21-22)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 말은 우리의 구원은 로마서의 진술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되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서는 야고보서의 진술과 같이 하나님 앞에 항복하여 자신을 드리는 예배의 삶이 행함으로 나와야 한다. 믿음만 있다고 말할 게 아니라 행함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성도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는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니다.
3. 두 번째 살펴 볼 내용: 파라독스(역설, 아이러니: 언뜻 보면 일리가 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모순되어 있거나 잘못된 결론을 이끌거나 하는 논증이나 사고 실험 등) 상황에서 약속을 붙드는 믿음
하나님께서 분명 이삭을 통하여 자손은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런 이삭을 죽여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니 하나님의 자기 모순 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에 부딪힌 아브라함은 문제 해결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자신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만 했다.
(브루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은 그 사건을 하나님의 문제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을 조화시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할 일(자신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고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으므로-약속도 믿어야 하고 또한 명령도 따라야 하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 이었다. 아브라함의 임무는 오직 순종이었다. (순종한 결과 무엇을 선물로 얻었을까? 아들도 다시 돌려 받고 부활의 신앙을 얻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생각이 부딪힐 때를 경험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오직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비록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일단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기적이 일어 난다. 우리말 속담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돌 다리가 아니라 무너질 것 같은 다리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 때는 건너야 하는 상황을 많이 경험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상반 되는 경우는?
1) 막 8:35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령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라"이다. 그럼, 뭘 선택해야 할까?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2) 부자 청년 경우: 눅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하나님 약속은 무엇인가?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네가 찾는 영생이 주어질 것이다) 그럼 명령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상반되는 경우가 수 없이 많다. 그런 예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명령이 현실적으로 볼 때 허황된 것(아들을 바치라, 전 재산을 다 팔아 나누어주라,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으라) 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지 말아야 한다. 사탄은 항상 눈에 보이는 현실을 크게 보이도록 한다. 만약 아브라함이 당장 눈에 보이는 이삭의 현실만 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 어린 아들.. 아직 장가도 안 간 아들.. 100세 때 얻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런 걸 생각했더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오직 순종할 때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4. 시험을 통과한 후 얻는 상급: 부활의 믿음
시험을 통과한 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 무엇이었나?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창 22:5에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이 살아 있어야 성취 될 것인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브라함은 자신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은 이삭의 생명을 부활 시키실 것을 믿었다.
19절에서 도로 받다는 의미는 상급으로 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이삭을 돌려 주셨다.
위어스비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믿음의 시험이 더 어려워지지만 그 보상은 그만큼 더 놀랍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 하신 것처럼 가끔씩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기도 하신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히브리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다고 말한다. 실제로 드리진 않았는데 실제로 바친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이다. 왜 그럴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일까? 아들 이삭을 통해 자손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 이삭이 설령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자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분명 아들 이삭의 목숨을 살려 주실 줄(히 11:19)을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모리아 산으로 아예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 때문이다.
시험에 들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 시험을 통과하며 상급이 주어진다.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의 핵심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창 22:5에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이 살아 있어야 성취 될 것인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브라함은 자신은 이삭을 죽여도 하나님은 이삭의 생명을 부활 시키실 것을 믿었다. 19절에서 도로 받다는 의미는 상급으로 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이삭을 돌려 주신 것이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소중한 아들을 바친 것처럼 우리도 소중한 것을 주를 위해서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따른다면 그와 같은 믿음을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에 붙들려 살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연약해서 믿음을 실천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열심히 없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지 않는다면 믿음 안에 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순종을 원하실 때 우리를 내어드릴 때 우린 아브라함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며 부활의 소망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우린 아브라함을 배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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