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믿음으로 내린 결정 그리고 그 원천:(26절 상 주심을 바라봄)
1.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청함 받기를 거절
본문 24-25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말한다. 이 내용은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 내용과 비교해 보면 사실과는 다르다.
출 2: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2: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2: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2: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2: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출애굽기 2장을 보면 장성한 모세가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해 도망을 치게 된 것이지 본문의 내용처럼 모세가 스스로 바로의 공주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사실과 다른 히브리서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된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한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만약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처음부터 본문의 내용대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영화를 누리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더 좋아했다면, 결국 모세의 행동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준 모세는 있을지언정 하나님에 의해 고침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는 모세는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의 전지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자기만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바뀌게 되는 가로 증거 된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인간은 없다. 모세도,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믿음의 모습을 보였다면 그것은 그들을 고치시고 바꾸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의 결과일 뿐이다. 결국 믿음으로 산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인 것이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치게 된 것도 모세가 재수가 없어서 들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였다. 모세를 하나님의 일을 맡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 하신 일이다. 물론 모세가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세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분명 손해이다. 애굽의 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편히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을 하나님이 박탈해 버리신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모세를 향한 이 같은 하나님의 계획이 없었다면 모세는 애굽에서 편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인생이 달라진 것이다. 본문은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인생을 말하고 있다.
믿음이 모세를 이렇게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다고 해서 세상의 좋은 것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고 환상이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인생이 세상의 영화가 아닌 고난으로 이어졌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만난 신자의 삶은 세상의 영화와는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출 2:11-12 모세의 그런 행동은 사도행전 7:23-25절로 해석된다. 행 7: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7: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7: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짓밟히는 자기 동족들과 동일시 한 것 자체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 하는 것이다.
모세는 두 민족을 동일 시 할 수 없었다. 한 민족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 민족이고 애굽은 지배 민족인데 어느 민족을 선택할 것인가? 모세는 자기 민족인 노예 민족을 선택했고 그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위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위대한 거절이었다. 세상적 가치 기준으로 보면 어리석기 그지 없는 선택이었다. 그것은 그가 누리던 세상의 물질적인 지위와 혜택 전부를 송두리째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을 칭호를 거절한 행위의 뿌리에는 25절 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믿음의 가치관이 있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을 그저 이스라엘 백성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낼 사명을 받은 자신이 공주의 아들로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사명을 거절하는 죄였다. 물론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그 정치적인 지위와 특권을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력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고 억울하게 짓밟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뜻이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 하여 그들을 인도하여 내는 것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의 위치를 지키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였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공주의 아들 자리는 포기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거절하고 공주의 아들 자리를 지키는 것은 죄였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는 죄였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죄는 정욕과 탐욕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이 출세와 성공이라고 부르는 지위, 권력, 부 등이 하나님과의 사명과 충돌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택해서 성립되는 죄이다.
필로(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종교철학자)는 바로의 공주는 부왕의 외동딸이었는데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양자 모세는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였다고 했다. 성경과 에굽 역사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지는 않지만 설령 그랬다고 할지라도 모세는 당시 세계 대제국의 왕 자리를 그 모든 권력과 영광과 함께 거절했을 것이다. 그가 그런 거절을 했다고 해서 그의 앞에 대단한 명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의 거절은 곧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을 의미했다.
3.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하고
그러나,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영광과 특권을 누리는 것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었다. 죄는 쾌락으로 유혹한다. 모세는 애굽의 영화는 잠시 죄에 속아 누리는 쾌락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선친들 처럼 ‘ 더 나은 본향’, 하나님이 세우셔서 흔들리지 않고 영원한 본향에 가치관을 두었기 때문에 잠시 누리는 죄악의 쾌락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당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세상은 잠시이다.
인간의 문제점:
잠시인 이 세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길 원한다. 이 땅에 소망을 둔다.
출세, 돈, 명예, 얻기 위해 좋은 학교 가려고 한다. 최근 명문대 동시 합격 거짓말로 논란을 일으킨 ‘천재 소녀’ 사건을 두고 “성공에 대한 압박이 낳은 비극”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김양이 다닌 TJ 과학고의 재학생과 교사의 말을 인용해 “학생들이 학업 성적 외에 외부 활동에서도 인상적인 성취를 이뤄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라며"이런 압박은 부모와 교사들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전했다.
믿음의 사람은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죄악의 낙을 누리려고 하지 않는다.
4.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란?
헬라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수모이다. 수모는 불명예, 모독, 치욕을 뜻한다. 그리스도가 앞으로 받을 고난과 같은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 인간과 같은 몸이 되셨다. 모세도 그 왕좌를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노예 같은 신분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일단 같은 유대민족으로 부터 배신 당하고 죽었다. 모세도 동족으로 부터 배척 당했다.
행 7: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동족으로 부터 비판과 불신도 많이 받았다. 그가 이집트 왕자로 있었다면 그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시지 않고 하늘에 계셨더라면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명을 다하심으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처럼 모세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담당 함으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그 사명을 위해 그는 그런 수모를 담당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이끄는 삶이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모세의 믿음은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한 바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인간의 문제점은 사명을 위해서 고난 받기 싫어한다. 그리스도(하나님)를 위해서 수모 받기 싫어한다.
모세가 이런 차이 나는 생활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 때문이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은 ‘상 주심을 바라봄’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생명이다. 결국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의 생명이라는 귀한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상은 하늘의 생명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이미 그 귀함이 충족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보상이 모세가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당하는 길을 택한 동기였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앞에 있는 상을 위하여 현재의 고난을 참은 사람들이다.
모세는 충분히 우리들이 원하는 낙을 누리는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그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받았다.
복음의 메시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잠깐 동안 세상에 소망을 두고 낙을 즐기기 보다는 비록 고난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기를 더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돌이켜 보면 도저히 바뀔 수 없는 자신이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됨을 발견할 때가 있다.
짐 엘리엇 선교사 이야기.
1956년 미국 전역을 큰 충격으로 몰아 넣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로 짐 엘리엇의 이야기이다. 엘리엇은 사람의 뜻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오랫동안 혼자 기도한 뒤 그는 이국땅, 남아메리카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두 번씩 들어야 합니까?” 그는 에콰도르에서 사역했던 선교사와 교제하며 아우카 부족(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이 한 번도 전해지지 않았던 사람들, 즉 미전도종족)에 대해 들으며 그의 갈 길을 정했다.
1955년 가을 비행선교사 네이트 세인트는 아우카 마을을 발견했다. 그 다음 달부터 엘리엇과 여러 동료 선교사들은 호전적인 부족민들과 친구가 될 목적으로 비행기에서 선물을 떨어뜨렸다. 마침내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이들이 간단한 짐만을 챙긴 채 잔인하고 독하기로 이름난 아우카 족속들을 향해 나아갔다.
조그만 소비행기를 타고 해변에 내린 이들이 해변가에 텐트를 치고 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준비를 시작한 지 닷새 째 될 즈음, 선교 본부에서는 이들에게서 소식이 없자 혹시 하는 생각에 비행기를 보냈다. 그런데 바로 그곳 해변에서 다섯 명의 청년들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발견했다. 1956년 1월 8일 다섯 명 모두 아우카족 전사들에게 창과 도끼로 죽임을 당했다. 해변가에 그들의 시체가 피를 흘리며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들의 주머니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뽑지 않고 그대로 죽었다.
라이프 지와 타임 지는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얼마나 분노했는지 모른다. 당시 라이프 지에서는 이 사건을 10페이지에 달하는 기사로 다루면서 “그들은 부인들과 퀴추아 인디언과 히바로 인디언 사역을 하면서 아우카족을 알게 되었다. 아우카족은 수백 년 동안 외부인들은 모두 다 죽여왔다. 다른 인디언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였으나 선교사들은 아우카족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What a unnecessary waste!)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멀리 남미까지 가서 제대로 일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한 기자는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에게 찾아가 인터뷰를 하면서 또 다시 이런 말을 했다. “What a Waste!” 그러자 그 당시 20대 초반밖에 안 되던 그의 아내가 그 기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항의했다. “낭비라니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의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 뿐입니다. 이후로 다시는 내 남편의 죽음을 낭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 글들을 적을 당시 엘리엇은 겨우 19살이었다. 순교할 당시 그의 나이가 29세였는데, 그렇다면 그로부터 10년 전에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주님 성공하게 하소서..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 아니라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품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의 나무토막 같은 인생에 주여! 불을 붙여 주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주께서 소멸시키십시오.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짐 엘리엇은 이 땅에서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았다. “전능자의 그늘”(Shadow of the Almighty) 아래서 그분과 함께 풍성한 삶을 살기를 구했다. 그는 일기장의 한 쪽 구석에 이런 글도 적어놓았다.
”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언젠가는 놓아야 할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젊은이들의 아내 다섯 명은 한 두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들을 부둥켜 안고 남편이 순교한 그 나라를 찾아갔다. ‘우리 남편들이 못다 한 일들을 우리들이 마저 해야 한다’ 그들은 복음을 들고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아우카족을 다시 찾아 나선 것이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일 년간 간호사 훈련을 받고 아우카족에게로 갔는데 아우카족은 여자를 해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하여 부인을 해치지 않았다. 부인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목숨을 걸고 그곳에 갔던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우카족을 위해 여러 해 동안 헌신했다.
아우카족의 추장이 어느 날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이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애써서 수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부인의 말을 들은 아우카족은 감동을 받고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아우카족의 추장이었던 사람이 빌리 그레함이 주도하는 한 예배에서 간증을 했었다.
“우리들은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처럼 그분들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짐 엘리엇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다. 그의 선교사역은 결국 죽음으로 금방 끝났지만 복음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씨앗이 되는 죽음이었다.
예배에 참석한 와오라니 인디언 기독교인들 가운데 3명은 5명의 선교사 살해에 가담한 사람들로 이들은 현재 와오라니 교회의 담임목사와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짐 엘리엇과 동료들이 살해당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그들이 죽은 마을에서 수백 개의 교회가 생겨났으며, 엘리엇이 죽고 나서 태어난 아들이 그 교회 중 마을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남미의 열대 우림 속에서 죽은 지 40년 후인 1995년, 엘리엇이 졸업한 휘튼 대학에서는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다. 지금도 엘리엇으로 인한 부흥과 선교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사명)을 얻기 위해 언젠가는 놓아야 할 것(이 땅의 것들-심지어는 목숨도) 을 포기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 짐 엘리엇-
오늘 주제 처럼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처한 형편에서 어떤 것이 지금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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