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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얻는 믿음(세상보다 하나님 편에 서는 믿음) - 히브리서 11장 31절

차작가 2023. 11. 19. 12:50

도입: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 처럼 삽시다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셨다(창 22:12).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서 믿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셨다.

본론:

오늘 본문은 라합에 대한 이여기 이다. 라합에 대한 이야기는 여호수아서 2장에 잘 기술되어 있다. . 라합의 이야기는 단순히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줬기 때문에 여리고성이 멸망당하는 가운데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사건 이전에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낸 사실이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보내서 여리고 성을 살피라고 하셨다. 하지만 과연 정탐꾼을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이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땅인데 정탐꾼이 무슨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정탐꾼을 보낸 여호수아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뭔가 불안했기 때문에 미리 점령할 땅을 살펴보고자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불신앙에 대한 책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부분이 없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것은 곧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냄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일까? 그것은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서 기생 라합을 만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기생 라합을 통해서 믿음을 보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결국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이 입장에서 라합을 바라보아야 한다.

라합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의 실체는 버림과 얻음이다. 버림과 얻음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믿음의 실체이다. 정탐꾼이란 곧 간첩을 말한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탐한다는 것은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여리고에 있어서는 위험천만한 인물들이다.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만약 정탐꾼을 숨겨준다면 그것은 단지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차원을 지나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반역죄에 해당된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것보다는 간첩을 숨겨주는 것을 더 중한 죄로 여긴다.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줬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기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정탐꾼에게서 자기 목숨을 내걸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자기 목숨을 잃을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 아닐까? 이것을 단순히 인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만약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탐꾼이었다면 라합이 어떻게 했을까? 그래도 숨겨 줬을까? 아닐 것이다. 왜 이스라엘의 정탐꾼이었는가하는 것은 여호수아서 2:9-12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 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2: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2: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이것이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이유이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에게는 하나님이 있었다. 그냥 신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개역-상천하지)하나님이시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에게 무너진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군사가 몇 명인지, 힘이 얼마나 센지 이런 것을 따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 줬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 여리고 성은 무너진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그리고 정탐꾼을 선대하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임을 알았다.

라합에게 다급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정탐꾼이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곧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시고 아모리 사람을 전멸하게 하신 일을 알고 있는 라합으로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스라엘이 곧 쳐들어 온다는 증거인 정탐꾼을 볼 때 다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급함 속에서 라합이 취한 행동은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이었다.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는 반역이다.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이것을 여리고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이기심으로 보인다. 나 살자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나라를 배신한 행위는 아주 파렴치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라합은 설사 여리고가 무너진다고 해도 끝까지 여리고 편에 있어야 당연하다. 그런데 성경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자기 나라를 버리고 이스라엘 편에 선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단 라합의 행동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지 이렇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규범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행위는 믿음의 열매이다.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도덕과 윤리, 의지로 인해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라합은 자신의 동족은 배신하고 대신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다. 라합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받아야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라합이 이스라엘을 도운 것이 발각이 되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은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탐꾼을 도운 것은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음을 뜻한다. 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던 나라를 버리는 것은 자신의 모든 터전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라합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편안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멸망의 나라에서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참여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정탐꾼을 도와준 것이다.

라합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생명을 향한 믿음이 라합을 이렇게 행하도록 한 것이다. 라합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니다. 믿음이 라합으로 하여금 참된 길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그 길로 가도록 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길을 갈 수 있을까?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내가 믿음이 있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게 된다.

믿음은 라합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하나님 편에 서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라합의 이러한 믿음은 오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도구로 우리들 앞에 세워졌다.

그래서 본문에서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한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믿음이 없었다면 라합은 여리고에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아니면 멸망당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라합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다.

또한 정탐 군이 들어왔음을 아는 자가 라합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정탐꾼이 들어온 것을 목격을 했고,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여리고 왕에게 고했다(2절). 그리고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기별해서 여리고를 탐지하러 온 정탐꾼을 끌어 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라합은 자신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또 이미 성 밖으로 도망을 쳤다고 말을 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똑같이 정탐꾼을 목격한 입장인데 왜 한쪽은 그들을 보호하고 한쪽은 죽이려고 하느냐는 점이다. 물론 쉽게 생각하면 내 나라를 해치는 정탐꾼을 잡아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라합은 국가를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라합이 국가를 배신하고 이스라엘 편에 선 이유이다. 그것은 라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면 가나안의 멸망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신들의 운명이 약속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지 않았다. 자기들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들을 가리켜서 순종치 아니한 자라고 말한다.

정탐꾼을 죽이려고 한 것이 왜 순종치 않는 것일까? 하나님이 여리고 왕에게 정탐꾼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를 하기라도 했을까? 그러나 지시는 하지 않았다고 해도 가나안 땅을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정탐꾼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탐 군을 죽이고자 한 것은 자기 세계를 보존하고자 한 것이고, 영접한 것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결국 라합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말고 자기 세계를 위해서 살지 말고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믿음으로 살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는 약속을 믿는 자이다. 약속의 확고함을 믿고 흔들림이 없이 사는 것이 곧 믿음이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의로운 자이다. 믿음이 이미 그를 의롭게 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기생은 분명 세상 도덕적으로 볼 때 나쁜 일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창녀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그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 행위를 본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라합은 여리고 왕의 물음에 대해서 거짓으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정탐꾼을 살리고자 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거짓말한 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은 인간의 행위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규정된다. 약속을 믿는 자는 옳은 자이다 그러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른 자이다.

라합의 믿음은 약속에 대한 확고함이다. 세상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 있다. 라합은 확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일을 따라가기에 여리고라는 자기 세계를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도 담보로 내 걸 수 있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연 라합의 믿음일까? 약속에 대한 확고함으로 살고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고 살아가고 있나? 이 세상은 멸망당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확정된 일에 대한 확고함으로 살고 있나? 그렇다면 그분은 세상에 대해서 미련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이 사는 분이다. 얼마든지 라합의 자리에서 정탐꾼을 영접할 수 있는 성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정탐꾼을 보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탐꾼을 새로운 세계를 몰고 오신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말할 때 그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정탐꾼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의 확고함에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정탐꾼을 영접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보다는 자기 세계를 붙들고 자기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필시 정탐꾼을 밀쳐 낼 것이다.

라합이 자신이 나라인 여리고를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를 볼 수 있었고 그 나라에 자기 인생을 걸었기 때문이다. 나의 나라는 여리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기에 여리고를 버릴 수 있었다.

우리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에 남은 인생을 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버려야 얻을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길 축복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