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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쫓겨난 교회 - 요한계시록 3장14-22절

차작가 2023. 11. 19.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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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는 위기에 처했다.

(번영신학 prosperity gospel – 바벨탑에 갇힌 복음 – 행크 해네그레프(미국 기독교 연구소 소장-이단 사이비 전문가) 조엘 오스틴이나 조이스 마이어 같은 믿음 신학 faith theology에 대한 비판.

교회 내에 만연하고 있는 잘못된 믿음과 복에 대해서 소개한다. 마른 뼈 환상을 인용하면서 너 수표책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사는 동안에 너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네게 들어오는 모든 수입의 10퍼센트는 하나님의 일에 쓰일 거야.

교회마다 예수는 부른다. 그러나 교회가 부르는 예수는 기적을 일으키고 인간의 부탁과 소망을 접수하는 예수이지 십자가에 양손이 못 박혀 피 흘리며 매달려있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보다는 우리의 사업을 잘 되게 해주고, 자식들 세상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주고, 병 낫도록 기적을 일으켜 주는 예수님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사실 육신에 매어 사는 인간에게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보다는 복주는 예수님이 더 반갑고 매력 있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십자가의 피의 현장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재미는 복이 주어진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십자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리게 되고, 반대로 세상에 대해서는 더욱 더 집착하며 살아가게 된다.

세상 것으로 배를 채우려고 하고, 세상 것이 채워지면 그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본론: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쓴 편지이다. 예수님은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그 행위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고 말씀하셨다. 15,16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미지근하다는 것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의 열심 여부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보통 행동에 열심히 있는 사람을 '신앙이 뜨겁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전혀 행동이 없는 자를 가리켜서 냉랭하다, 신앙이 차갑다고 말한다. 그리고 열심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를 미지근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로서 예수님만 내 소망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신이 원하는 다른 혜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지근한 상태이다. 이런 사람은 토해서 내친다고 말하고 있다. 미지근한 상태는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세상 것으로 배불렀기 때문이다.

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라오디게아의 상태였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도시였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다. 그래서 은행업이 발달해 있었고 아주 유명한 의술 학교와 의료 시설이 있었던 도시였다.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좋은 옷을 입고 부요했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모든 면에서 풍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배부름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곤고함과 가련함과 벌거벗음과 눈먼 것을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이란 존재가 비참하기 때문이다. 가련하고 곤고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가 인간이다. 아무리 세상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둘러싼다고 해도, 인간은 비참함과 멸망에 빠져야 할 곤고한 자에 지나지 않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살아가는 소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곤고함과 가련함을 가려주는 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자기의 실체를 깨닫지를 못한다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착한 일도 많이 하고 교회도 이렇게 부흥을 시켰는데 내가 왜 가련하고 부끄럽고 눈먼 존재입니까?'라고 반발할 뿐이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잘 사는 교회였다.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었다. 교회를 과시했다. 교회가 자랑거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갈 이유가 없고 예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수치를 가려준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먼 인간을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성도로 만드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자신의 수치를 아는 자에게만 필요하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피를 향해서 나아올 뿐이지, 자신의 수치를 보지 못한 자는 절대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지 않는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배부름으로 인해서 자신의 수치를 보지 못했다.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곤고함과 가련함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나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서 문을 열지 않는 것이다.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배부르게 사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자들에게서 예수님은 이미 쫓겨나 있는 상태임을 말한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자가 누구이며 다가와서 문을 열 자가 누구이겠는가?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생을 말하고 섬김을 말하고 세상을 포기하고 하늘만을 바라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리가 있을까?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자가 없고,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갈 자가 없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인간으로 하여금 문을 열기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해석을 해버린다. 우리가 문을 안 열어서 예수님이 못 들어오는 것이니까 문을 열어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선교 단체에서 전도할 때 이 문구를 많이 인용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립니다 마음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라는 말로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지만, 인간에게는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자질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적인 말인가를 알 수 있다.

인간 스스로 마음을 열 수 있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면 구원의 주체가 누가 될까? 결국 인간 스스로 생명을 천국을 택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되고 만다. 결국 예수님은 천국이라는 것을 손에 들고 인간에게 찾아와서 그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 '제발 내가 들고 있는 천국을 받아 달라'라고 사정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이런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무슨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겠는가? 그저 내 하기 나름이지 않을까?

20절의 말씀은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쫓겨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사는 인간(교회)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쫓겨나신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과연 누가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자이다. 하늘의 생명을 보게 됨으로서 배부름과 풍요와 세상의 것을 누리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쓰레기 같은 것인가를 안 자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에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때문에 문을 연다는 것은 '나는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세상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세상 것에 미련을 버릴 수가 있고 주님에게 모든 인생을 맡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을 열고 주님이 나에게로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입으로 '주여'를 삼창한다고 해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주여 주여 하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바램과 욕망과 노력들이 모두가 헛된 것이고 쓸데없는 것임을 알게 되고 가장 헛되지 않은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겠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 것으로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이 산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예수 없는 내 인생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주님 한 분 바라보기 위해서 나오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한 성도의 모습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모두가 세상에서 배부르게 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이다. 예수를 믿어도 배부르게 믿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일이 잘 되어가고, 좋은 것을 많이 소유한 상태에서 예수를 믿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아닐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남들보다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는 아쉬워하고 애통해 했던 우리이다. 남들보다 못 사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고 비참함으로 여겼기에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해주고 당당하고 힘 있게 살게 해주는 것은 역시 돈이고 권력이라는 생각에서 떠나보지 못했던 우리가 아닐까?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문을 열어라'라는 말씀은 우리의 결단이나 행동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문을 여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란 예수님이 나에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18절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하면 구원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이미 영광스러움에 들어있는 자는 바로 이런 자다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에게서 이런 혜택을 받은 사람이다.

금을 사고 흰 옷을 사고 안약을 사라는 말씀 역시 이것들을 사면 구원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제공해 준 혜택이라는 것이다. 그 혜택을 알고 그것을 최고의 복으로 인정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쪽에서 어떤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그것을 나의 최고의 복으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사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성도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복을 받은 자답게 복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신 복이 무엇일까? 19절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복이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고 회개하게 하신다. 이것이 복이며, 이 복을 아는 성도는 우리를 징계하시고 책망하시고 회개하게 하신 예수님께 '아멘'하게 된다.

우린 어려움이 닥치면 원망한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일이다. 때문에 예수님이 주신 복을 아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아멘 하게 된다.

14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낸 주님에 대해서 이르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일하시며 하늘을 증거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아멘'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를 징계하시고 책망하신다면, 그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과 곤고함을 알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며 은혜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다. 세상 것으로 배부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크고 교인 수가 많으면 그것으로 자기 능력을 삼고 자랑하기 때문에 곤고함과 가련함을 보지 못하게 된다. 또한 교회가 작은 것 혹은 가진 게 없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기 때문에 진짜 부끄러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는 부요하다고 했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벌거벗었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먼 상태였다. 그것이 곧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실체를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먼 존재인가를 보지 못한다. 돈 있고 집 있고 자식 있고 직장이 있어서 잘 살고 있으니까 자신을 가련하고 곤고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한다. 세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세상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곤고하고 가련한 모습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린 모습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던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고, 내가 곧 가난하고 곤고하고 가련하고 보지 못한 눈 먼 소경이었음을 알게 하신다. 그럴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 재물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문을 연 성도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이다. 그래서 복이라고 말한다.

결론:

오늘 본문은 오늘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지를 다시 점검하게 해주는 말씀이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만 필요하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역시 돈을 떠나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것이다. 천국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인 줄 알았는데, 돈이 없다는 것 때문에 남들처럼 풍족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했던 실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이다. 참으로 가련하고 곤고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다시 한번 "나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달습니다. 세상 것이 나를 부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부요하게 합니다" 라고 고백하길 소원한다. 이것이 영광스러움에 든 성도의 모습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가심을 믿는다. 성도는 예수님을 안다는 것으로 부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란다. 예수가 쫓겨난 교회가 아니라 또한 예수를 쫓아낸 성도가 아니라 하늘의 영광에 합당하게 살아가길 소원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주님에게 모든 인생을 맡기시길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