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예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이 어떤 것인가를 일곱 교회에 있었던 사건들과 모습들을 통해 교회를 자랑하고 높여주고 책망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어떤 모습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인가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빌라델비아 라는 도시는 유명한 거라고는 지진이 많다는 것 이외에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아주 가난한 도시였다. 당연히 빌라델비아 교회도 아주 가난했고 수적으로도 아주 적은 교회였다. 그리고 빌라델비아 교회는 빌라델비아에 사는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따돌림과 핍박을 당했던 그런 교회였다.
7번의 큰 지진으로 도시가 거의 황폐하게 되었고 AD17년에 있었던 큰 지진 후에는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할 만큼 커다란 타격을 입었었다. 그때 (도시를 재건할 때)에 로마 황제의 지원을 받아 도시를 재건했는데, 도시를 재건하고 나서 로마 황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도시의 이름을 새롭게 바꾸었다. (New city of caesar) ‘시저에게 바치는 새로운 도시’라는 새 이름으로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 한 30여 년 간을 그 이름을 쓰다가 다시 빌라델비아로 이름을 고쳤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는 날까지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었던 도시였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는 그 사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하겠다.’라는 표현을 쓰시는 것이다.
본론: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8절에 ‘네 행위를 아노니’
하나님이 아신다. 너의 죄짓는 것도 알지만 너의 수고로움도 안다는 말에 위로를 얻는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더라도 주님만은 알아 주신다는 것이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더라도 그 억울함을 하나님은 아셨다. 다니엘이 다른 사람들의 시기로 사자굴에 떨어 졌을 때도 하나님은 그의 억울함을 아셨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좌절할 필요도 없고 어디 다른 데에 호소할 필요도 없다.
I. 작은 능력에 대해서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1. 능력이 작고 크다는 기준은 사람들이 내세운 기준이다. (사람들은 세상이 알아주기를 원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존재의 가치 향상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 어떤 인간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않는다.
인간이 선악과가 인간의 눈을 밝게 하고 하나님같이 되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는 말을 사단으로부터 들었을 때, 선악과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는 단지 맛있을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치 향상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효능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이다. 이러한 사단의 유혹에 빠져 사는 모든 인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가치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가지고 판단을 한다. 가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자신에게 선한 것이고,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은 악으로 판단하며 스스로 선악의 선택을 하며 살게 된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해 줄 수 있는 것을 찾아간다. 세상이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을 자신이 소유함으로써 자기 가치가 향상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이 일률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물질을 통해서 자기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지식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가치 향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게 있다. 적은 것은 대체적으로 싫다는 것이다. 돈을 적게 갖고 있는 것, 연봉을 적게 받는 것, 사는 집이 작은 것등…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가치를 적은 것 보단 큰 것에 둔다. 그런데 교회의 가치는 멋있는 예배당과 많은 수의 교인들, 넘치는 재정, 구제와 선교 사회활동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보시는 성도, 교회는 어떤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자.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적은 능력이라는 것도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적은 능력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적은 능력이란 적은 힘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 수도 적고 돈도 없어서 힘이 없는 교회라는 뜻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작은 능력의 교회는 일반적으로 숫자도 적고 가진 재산도 적은 교회를 말한다. 이런 면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숫자도 적을 뿐더러 지역사회에 영향력도 적은 교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정도로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생존에 위험을 가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유대인들의 핍박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2. 아마도 이런 이유로 예수님도 빌라델비아 교회를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실 모든 교회 모든 성도가 보잘 것 없고 작은 능력의 교회이고 성도들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이다. 자기의 힘으로 구원 받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곳이 진정한 교회이다. 자기의 힘으로 아니라 예수님의 전적인 죽으심으로 인하여 구원 받았음을 고백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힘만 의지하는 작은 능력의 교회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럼 성도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성도의 존재 가치는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지 교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분으로 오셨다가 힘없는 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힘의 구조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힘을 포기한 분이시다. 바로 이 분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성도이다. 그래서 성도는 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세상에 힘 되는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지 않는 존재이다. 오히려 세상이 무시하는 것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그것만 과시하고 사는 자가 성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생존이 위태로운 지경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치 않게 된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그랬다.
3. 그럼, 어떻게 작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키고 이름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나?
자신의 작음을 인정하는데 서 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예수님 밖에는 의지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앞서야 한다.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함으로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씀 하신 것은 바로 어린아이가 부모를 의지하는 것 처럼 자신의 의지로 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만 생각하고 그 긍휼하심을 전적으로 의지 할 때 천국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도 마찬가지로 어린아이 심정으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으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었고 예수님 이름을 배반하지 않게 되었다.
능력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은 겸손이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더 큰 능력을 가진 자를 의지할 수 있다.
4. 작은 능력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게 아니다.
작은 능력이라도 지킬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이다. 따라서, 지켰다에 관심을 두지 말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능력이 없다. 어떻게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까?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 해서는 받지 못한다. 그 능력을 받도록 의지해야 한다. 그런 능력은 바로 참된 은혜를 생각할 때 주어진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였다.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 우리는 왜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날까? 사사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게 된 동기가 바로 물질주의였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 이스라엘은 무기도 어떤 재산도 없었다. 그야말로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상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 보내신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라고 하셨다. 그들의 문명이나 문화를쳐다 보지 말라는 것이고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족속을 다 몰아내지 못한다. 그들의 욕심 때문이었다. 가진 게 없음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만 살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살기 원하지 않았다.
또 어떨 때 배반하나? 외부로 부터 핍박은 거세지고 반면에 믿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때 이다. 암살 영화의 경우 배신자의 말을 생각해 보자. 일본의 힘을 점점 거세지고 반면 독립군의 위상은 점점 약해져가고 해방에 대한 가능성은 점점 사라질 때 동지들을 배반한 걸 볼 수 있다. 배반자는 해방에 대한 희망을 버린 반면 해방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지킨 자는 결국 해방을 맞게 되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능력은 적었지만 예수님 재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 믿음이 온갖 핍박으로부터 믿음을 지킬 수 있었고 결코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II. 작은 능력으로 이기는 교회에게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주시는가?
1.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10절)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내의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말씀(복음)은 성도로 하여금 인내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승리가 있기 때문에(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얼마든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그 분의 인내에 대한 복음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를 당했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수난과 죽음과 인내와 부활을 이해하고 잘 지켰다. ‘그러한 너희들을 내가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400m 달리기 데릭 레드몬드 선수 이야기:
150m에서 힘줄이 끊어졌다.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중에 관중석에서 한 분이 뛰어들었다. 고통 가운데 달리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달려온 아버지 였다. 아들아 이쯤 해서 포기하면 어떻겠니? 아니오. 끝까지 달리렵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완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트랙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아들의 고통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그리고 끝까지 함께 하신다.)
그래서 11절에서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성도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를 굳게 잡은 자는 아무도 그 면류관을 빼앗지 못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라면 우린 결국 하늘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린 연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드신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긴 자라고 한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드는 그 은총과 자비가 실패되지 않음을 굳게 의지하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서 우리에게 면류관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 면류관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이것이 성도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한다.
2.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고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2절)
이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기둥들은 결코 다시 나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기둥 위에다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 교회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새기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성전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그 기둥은 성전을 지탱하는 것이다. 그 기둥이 빠져 버리면 성전은 붕괴되고 만다. 예수께서 교회더러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가 빠진 성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임을 천명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성전은 붕괴되고 말 것처럼 묘사하셨다. 우리는 그처럼 하나님께 대우를 받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 기둥이 ‘난 도저히 어려워서 못 하겠다’고 포기하더라도 끝까지 끌고 가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다. 그리고 그 위에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이다.
새 예루살렘, 완성된 참 성, 완성된 교회의 모습이 이렇다.
결론:
성도는 이겨야 할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자로 산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이긴 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이긴 자이다. 때문에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고 그 이름을 배반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주님의 성전의 기둥이다.
오늘날 교회의 기둥을 교회를 위해서 헌신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기둥은 이긴 자로 사는 성도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성도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면, 세상에서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섭섭할 것도 없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정신이 들어야 한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세상이 주는 헛된 망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적은 능력의 자리로 밀어붙일 때, 그것을 내가 과연 이긴 자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세상의 실패가 천국의 실패가 아니다. 사람이 세상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가 하락되는 것 때문이지만 성도는 이미 이긴 자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이미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는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 그런데 세상에서의 실패를 두려워 할 이유가 무엇이며, 적은 능력을 부끄러워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이긴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승리한 자로서 세상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며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었고 천국에 이미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의 생명이라는 놀라운 가치가 주어진 성도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보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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