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일곱 교회는 교회가 본받아야 될 모범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고발하기 위해서 있다. 이렇게 고발된 모습을 통해 어떤 모습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본론:
지리적 역사적 배경:
에베소(인내)는 로마 속령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였다. 성인 남자의 인구가 40,000명이 넘었고 전체 인구가 225,000명이나 되는 거대한 도시였다. 거기다 에베소는 로마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인정받아서 자치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로마군이 주둔하지 않았고 가끔 총독이 방문해서 회의를 주재하고 가는 그러한 자유로운 도시였다. 에베소에는 카이스터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에 무역을 위한 항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강이 주변 산들에서 내려온 침적(沈積) 토 때문에 점점 강이 낮아져서, 그럴 때는 항구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다시 도시를 재 정비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에베소 교회이기에 5절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의 부분에 ‘회개치 않으면 내가 속히 임해서 촛대를 옮기리라’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섬뜩했을 것이다. 그들은 촛대가 옮겨지면 그곳이 얼마나 황폐케 되는지를 항구를 옮기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고 있었고 아데미 뿐 아니라 많은 우상들을 섬기던 도시였다. 오죽하면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쫓겨날 정도였다.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아데미 신을 섬기던 자들과 다른 우상을 섬기던 많은 사람들이 광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면서 우상 판매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베소는 에베소 원주민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다른 헬라계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곳이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기 전까지 목회를 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곳이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60마일 떨어져 있는 밧모 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처음 편지가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이다’
영적 배경:
일단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다. 여기서 쓰인 ‘알다’라는 단어는 ‘기노스코’가 아니라‘오이다’이다. 기노스코는 후천적인 교육과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지식의 진보’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이다. 반면에 ‘오이다’는 처음부터 완전하고 완벽하게 삶의 모든 사실들을 사진 찍듯이 아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교회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말이다.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신다. 거기서 쓰인 행위는 ‘에르가’이다. 이것은 복수이다. ‘행위들을 안다’는 말이다.
에베소 교회는 실천에 있어서도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실천이 있는 교회였다. 그것도 주님이 칭찬하실 행위들이 많았다. 오늘날 교회가 행함이 없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고 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러한 행함이 풍성한 교회였다. 게다가 그 행함은 그저 하는 척하는 행함이 아니라 ‘수고’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실 정도로 강도가 깊은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 수고는 한두 번 하고 마는 수고가 아닌 지속성이 있는 ‘인내’의 수고였다.
어떤 박해와 방해가 와도 참고 견디는 지속적인 수고가 있었다. 게다가 그 행위들과 수고와 인내는 인간적인 야망이나 자랑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위한 것들이었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대단한 실천이 있던 교회였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정통 교리마저 가지고 있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디모데-아 볼로-브리스 길라-사도 요한 같은 성경에 나오는 쟁쟁한 인물들이 목회를 한 교회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 때 3 년간 머무르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5시간씩 2년 동안 기독교 교리 설교를 했던 교회이다.
매일 다섯 시간이면 오늘 날로 따지면 보통 하루에 7편씩의 설교를 들은 것이다.
거의 5000편의 설교에 해당하는 교리를 사도 바울로부터 직접 배운 사람들이다.
일주일에 한편씩 설교를 듣고 가는 Sunday christian들이 꼬박 안 빠지고 100년을 들어야 할 분량이다.
에베소 교회는 그렇게 정통 교리에 바로 서 있었기 때문에 2절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했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를 칭찬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잘한 것과 못한 것을 평가하기 위해서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교회다운 모습을 말씀하고 지상 교회의 현재를 고발하기 위해서 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칭찬들은 에베소 교인들의 행위에 중점을 두지만, 예수님은 에베소 교인들의 행위를 통해서 주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칭찬을 하시는 것은 '에베소 교인들아 잘했다'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이런 마음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사도가 아닌 자를 시험하여 드러낸 것을 칭찬하셨다면 그것이 곧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란?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당의 행위란?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니골라가 변절하여 이단이 되었는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말한다. 이들은 영지주의 이단설을 받아들여 당시 교회에 적잖은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 진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육체나 물질은 악한 것이고 영적인 것만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육체나 물질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영적으로만 거룩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한 가르침은 헬라 철학 사상과 기독교 교리를 통합하여 만든 일종의 철학 사상이었다.
이러한 니골라당의 행위를 예수님이 미워하셨고 에베소 성도들도 함께 미워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용납하지 않는 것을 우리도 용납하지 않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참된 교회의 모습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고 사도 아닌 사도들의 거짓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마음과 같이 악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용납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칭찬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관심을 그들이 잘했다 못했다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거짓 사도(거짓 가르침)를 용납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항상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가 아니면 가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가를 주의해야 한다.
성도는 항상 주님이 원래 생각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항상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마음에 담고서 우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곱 교회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원래 생각하는 교회의 기준에 맞은 모습은 칭찬을 하신 것이고 맞지 않은 모습은 책망을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 대단하다'라고 하지 말고 '지금 나는 주님의 교회의 기준에 맞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일곱 교회 이야기이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들은 것은, 예수님의 기준에 맞지 않은 모습 때문이다. 4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책망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처음 사랑은 무엇이고 처음 사랑을 버린 모습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1) 처음 사랑을 버렸다
처음 사랑: 복음에 대한 불같은 열정, 봉사 및 헌신과 예배에 대한 강력한 동기.
(이찬수 목사님 설교 중 어느 목사님의 간증 이야기)
*첫 사랑에 관한 이야기*
어느 목사님이 청년부 때 담당 목사님 댁에 놀러 감. 거기에서 앨범을 보게 됨. 첫 장을 넘기니. 눈물이 범벅된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보자 마자 눈물을 흘림. 사연인즉 애가 안 생겨서 7년 기도해서 드디어 임신하게 됨. 산모에게 문제가 생김. 바로 수술해야 하고 전신마취해야 하니까 아이를 지워야 한다고 함. 아이를 지울 수 없었음. 인격적인 교감을 나눈 상태에서 지울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림. 마취 안 하고 수술 하라고 요청. 말도 안 되는 일임. 산모를 수술 대 위에 사지를 묶고. 약솜을 입에 물게 함. 그 고통은 말도 안됨. 비명 지르고 기절하고 또 깨어나고 기절하는 반복. 지금 밖에서 목사님이 피눈물을 흘림
그렇게 해서 살려낸 아이에게 준 편지가 그 앨범에 들어있던 편지. 편지 내용. (애 이름이 영빈이)
사랑하는 영빈아. 네가 이 땅에 태어나기 위해서 너희 엄마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아느냐? 잠깐 이 땅에 있어야 할 생명을 위하여 너희 엄마는 지옥보다도 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영빈아.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생명의 근원이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피 흘리고 고통 당하고 죽음을 맛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이 목사님이 문밖에서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으면서 경험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편지 말미에 이렇게 글을 맺었다.
영빈아. 네가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희생할 수 있는 네 어머니와 예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늘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 거라.
바로 이렇듯 그 처음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행위이며 사랑이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엔 그런 사랑이 넘쳤었다. 행 20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 때 형제들이 그를 붙들고 목 놓아 울었다는 것이 나온다. 그만큼 사랑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 후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이 편지를 받아 적을 때는 ‘행위도 여전히 풍성했고 교리도 바르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형식적인 행위요 형식적인 지식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바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행위로 이단들도 쫓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부터 디모데, 아볼로, 브리스 길라, 요한 같은 자기들의 목회자들을 들어 자기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그러한 외적인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 사랑을 버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린 모습이 어떤 것이냐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예수님은 처음 사랑을 원하신다'라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 나에게 처음 사랑이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지 어제 처음 사랑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오늘을 평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즉 과거의 것으로 미래까지 보장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현재 지금이 내 모습을 물어보신다. 어제의 신앙을 바라보지 말고, 오늘의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물으면서 사는 것이 주님이 기대하신 모습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구제를 많이 하는가 적게 하는가, 선교를 하는가 안 하는가, 열심히 있는가 없는가, 기도를 하는가 안 하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교회를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린 단지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영빈이의 아빠 목사님이 영빈이에게 그 눈물의 편지를 남겨서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 아닐까?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과 동화되었거나 타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뭔가 안다고 하는 사람들,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지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이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하시는 것도 바로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기뻐하는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볼 수 있다.
신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모두 같다. 처음에는 뭔가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세월이 갈수록 세상의 방식에 같이 동화되어 버리고 나중에는 순수함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성도는 세상에 동화되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40년을 믿어도 1년을 믿은 듯 신앙생활하자는 얘기를 드리고 싶다. 다시 말해서 처음이나 나중이나 처음의 순수한 그 마음으로 주님을 찾자는 것이다. 아는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내 것을 고집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는 자로서 주님을 찾아 나오자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오직 주님에게만 관심을 둘 수 있다. 교회에 와서도 엉뚱한 것으로 얼굴 붉히는 일이 사라질 것이다. 40년을 믿었어도 일 년을 믿은 듯 모이는 교회라면 분명 사랑이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 우리 주님은 뭐라고 권면하고 계신가?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생각하라’라고 하는 것은 그저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 아니라 (그 헬라어 단어‘므네모뉴오’는) ‘remember‘’기억하라’는 말이다. 현재 시제이다. 계속 기억하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계속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복음을 계속 상고하고 묵상하고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금방 교만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억하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즉 성경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해야 한다.
2)‘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연이어 ‘행하라’ 하고 말씀하셨다.
둘 다 부정과거 실제이다.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김유신 장군이 기생집 출입을 끊겠다고 결심한 후에 말위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 김유신 장군이 평소에 잘 가던 대로 기생집으로 향했다. 김유신 장군이 잠에서 깨어 말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다. 그것은 말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바른 선택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동반돼야 한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처방은 늘 복음을 기억하고 그 복음에 근거하여 자신의 그릇된 삶을 회개하고 바른 선택에 대한 행함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그렇게 돌이켜 회개하고 행하는 자들이 알곡이다.
=> 정통성을 지키려다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경직되어 버린 것을 회개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정통성을 고수했다 해도 결과적으로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러한 정통은 죽은 정통이요 하나의 기독교 철학이 되고 만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정통을 고수하는 것과 함께 교회의 본질인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가 세워질 때 근 40년이 지나면서(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아마도 2세들일 것이다. ) 생명이 없는 형식적 정통주의가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의 정절을 칭찬하시면서 사랑을 잃어 버린 덤을 책망하셨다. 교리적 순결과 사랑의 실천은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결론:
아들 영빈이가 커서 그 아버지의 사랑의 편지를 읽었을 때 어떤 각오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고통을 인내하고 자신을 나아 준 엄마를 외면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 그 고통 당하시면서 까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사랑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요 음성일 줄 믿는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늘 쓰임 받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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