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진심으로 주님만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길은, 나에게 있는 세상의 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갈 때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많을 때는 내가 주님만 사랑하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주어진 것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잘라져 나갈 때, 진짜 주만 사랑하는 성도라면 세상 것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사랑이 흔들리거나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주님만 사랑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핍박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
본문 13절에 보면 "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한다.
버가모 교회는 이미 순교자가 나왔을 정도로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었다. 당시 버가모 교회는 그 로마의 권세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정한 권세와 심판은 우리 주님 것이라는 것을 먼저 확인시키면서 편지를 여는 것이다. 계속해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거기는 사단의 권좌가 있는 데라’는 표현을 쓰고 계신다.
버가모 라는 도시는 로마 ‘아시아도’의 행정수도였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신전인 아우구스투스 신전을 비롯한 황제의 신전이 3개나 있었고 제우스 신전, 아테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스클레 피오스 신전 같은 그들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4개나 있던 그야말로 우상 천지인 도시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버가모를 가리켜 사단의 권좌가 있는데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다. 당연히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가 강요되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그러한 외부적인 핍박을 잘 견뎌냈다. 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아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안디바라는 순교자가 나오기도 했다.
여기서, 안디바는 가이사에게 굴복하지 않고 주님께만 충성하고 주님만 사랑하는 성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예수님이 칭찬하신 내용이다.
일곱 교회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일곱 교회에 대한 내용에서 주의할 것은 교회 자체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에베소 교회가 칭찬을 받았구나 우리도 저렇게 해서 칭찬 받은 교회가 되자'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칭찬하신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망하신 것은 교회가 아닌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 교회는 오늘 우리를 고발한다고 말씀을 드렸다.
이렇게 볼 때, 버가모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 참된 교회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옆에서 주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은 충분히 두려움의 조건이 될 것이다.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믿음 때문에 죽는 자를 목격을 한다면 보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두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보이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 마음을 다른 무엇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주님의 사랑이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것에는 어떤 기대도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없다. 다만 주님이 좋아서 주님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 이런 성도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그 사랑이 흔들리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다. 설사 주님 때문에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주께서 하신 일임을 알고 기쁘게 죽는 것이 바로 주님만 사랑하는 성도의 모습이다.
롬 8:35-39절에 보면 "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 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 말한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마음이 다스림 받고 있는 성도는 세상의 보이는 것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교회이다.
성도는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자이다. 그래서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없다. 그러나 보이는 것으로 사는 자는 보이는 것 때문에 얼마든지 믿음을 저버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14절에 나온다.
<발람의 교훈>
14절에 보면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라는 책망의 말씀을 하신다. 이것이 교회가 아니다.
발람은 구약 민수기에 나오는 사람이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자 모압의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그러자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해도 되는지 하나님께 묻겠다고 했고, 하나님은 '저주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발락은 많은 금은 보화와 사신을 보내서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럴 때 발람은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 물어 보겠다는 말을 한다.
이미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묻겠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사신들이 가져온 금은 보화에 마음을 뺏겼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그 말씀에 굳게 서서 발락의 요청을 거절해야 옳다.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왔다고 해도 발람의 속에 말씀이 살아있다면 다시 물어보겠노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시 묻겠다는 것은, 발람의 마음이 이미 돈에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가지고 발람의 교훈이라고 한다.
14절에서 이스라엘이 발람의 교훈을 지켜서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었다는 것은, 바람이 이스라엘에게 행음 하라 우상 제물을 먹으라고 가르쳤고 이스라엘이 그 말대로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좋은 것 때문에 말씀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행음하고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한 증거이고 그것을 발람의 교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으로부터 만족과 행복을 얻어내려 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집착하고, 중독됐던 것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발람의 교훈을 좇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회개하라’
오늘날의 기독교가 얼마나 이 발람의 교훈에 놀아나고 있나? (선지자인 발람이 돈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팔아먹은 것처럼 자기의 입신양명이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 교인들 등을 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나? 그들이 교인들의 등을 치기 위해 그들의 입으로 퍼부어 주는 그 ‘복’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나? 이것이 발람의 교훈이다.)
<니골라당의 교훈>
그들은 또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켰다고 한다. 니골라당은 당시 초기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무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자들이다. ‘우리는 이제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 간다.’ 이게 무 율법주의이다. 영지주의라는 것은 ‘영적인 것은 고급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아주 저급한 것이어서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육적으로 지은 죄가 영적으로 얻은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그 영지주의 자들은 교회 안에서는 아주 신실하게 종교 생활을 하다가 자기 삶의 현장에 나가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사는 그런 자들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막 살아도 구원받는 데 아무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다른 이들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니골라 당이다.
니골라 당은 발람과 같이 겉으로는 말씀을 중요시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에는 세상을 향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의 적이라고 한다.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라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적으로 드러난 자들이 바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12절에도 보면 버가모 교회에 편지하시는 예수님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검이란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싸우시고 심판하시는 원수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결국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원수 된 자는 모든 마음을 보이는 것에 빼앗긴 채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원수 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 삼아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교회이다. 이미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보다는 보이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겨 보이는 것을 제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주님과 상관없이 눈에 띄는 성과에 매달려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나, 봉사 많이 하고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보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가르치는 모든 것들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주님의 사랑을 대신하려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 속에서 구별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참된 교회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잘못된 것인 줄 알고 오직 주님의 사랑만 구하며 사는 것이다. 17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자들에게는 만나, 예수님 즉 하늘의 말씀을 주시고, 흰 돌을 주신다고 한다. 흰 돌은 깨끗한 돌을 의미한다. 그 돌에는 새 이름이 쓰여 있는데 그 이름은 흰 돌을 받은 자만 안다고 말씀하신다. 흰 돌에 쓰인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돌을 받은 자만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알게 한 자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님이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을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그것이 미래에 주어질 것이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 복음은 항상 already not yet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기는 자들이 감추어진 만나를 먹고 이름이 적힌 흰 돌을 받게 된다는 것이 주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을 받으신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돼서(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의 이름이 되고 여러분의 이름이 예수의 이름이 되는 연합) 이미 하나님 전에 나아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만나와 포도주를 배 불리 먹고 마시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으로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을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순교의 삶을 기쁘게 살아내게 된다.‘ 그러한 자들은 이 세상의 풍요를 위해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목마르지 않고 배가 고프지 않을 만큼 하늘의 잔치를 온 몸으로 느끼고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 충만하자. 그리고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입은 것으로 감사하고,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이긴 자로서의 성도의 모습을 마음껏 나타내길 바란다.
'주제별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싸움에서 이기려면 기본만 해도 이긴다 - 역대하 13장 1-18절 (2) | 2023.11.21 |
---|---|
주님이 오실 때까지 복음을 붙들라 - 요한계시록 2장 18-29절 (4) | 2023.11.20 |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 - 요한계시록 2장 8-11절 (1) | 2023.11.19 |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 요한계시록 2장 1-6절 (2) | 2023.11.19 |
작은 능력으로 이기는 교회 - 요한계시록 3장 7-13절 (0) | 2023.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