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주님이 오실 때까지 복음을 붙들라 - 요한계시록 2장 18-29절

차작가 2023. 11. 20. 15:10

<두아디라 소개>

‘두아디라’라는 도시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버가모나 이집트 등이 전쟁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지나게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여러 나라의 침략을 많이 당했던 도시였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안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돌파구는 상업을 통한 부의 축적 뿐이었다. 로마가 그 작은 두아디라까지 도로를 낸 것은 두아디라가 이렇게 상업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울 때 만났던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사람이다. 자주색, 빨간색은 지금도 염색이 힘든 색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 벌써 그런 염색 업이 발달했고 그에 따라 옷을 만드는 기술과 봉제업, 그리고 옷에 부착하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과 도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의 제련 기술도 발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한 곳에는 당연히 상업 조합이 생겼고 그 조합마다 각자 섬기는 수호신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호신을 섬기는 무당들, 제사장들이 많았던 도시였다.

그리고 그 조합들이 벌이는 축제는 아주 유명했다. 두아디라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 이교적 신앙의 모습이 많이 침투해 있었다.

주님은 그러한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시기에 앞서 먼저 칭찬하셨다.

 

1. 예수님의 칭찬

19절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서 네 ‘사업’이라는 단어와 나중‘행위’라는 단어가 ‘엘곤’이라는 같은 단어이다.

그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work’이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나는 네 행위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이런 뜻이다. 에베소 교회와 대조된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행위를 버렸다고 혼이 났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오히려 나중 행위가 더 많았다고 칭찬하셨다.

 

예수님이 교회에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고 믿음이고 섬김과 인내이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나? 예수님은 단지 사랑을 보이셨고, 믿음을 보이셨고, 섬김과 인내를 보이셨다. 결국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는 예수님이 공생애 때 하셨던 것과 일치된 길을 가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예수님이 안다고 하신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고 저주와 멸망 속에 처해져야 마땅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심과 믿음과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이 되셔서 겸손히 우리 인간들을 ) 섬겨 주신 것과 (죄인 하나라도 주께 돌아 오기까지 질책하시지 않고 기다리시는) 인내하심 때문에 생명 안에 거하고 산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서 하늘의 영광에 앉은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고백들이 처음보단 시간이 갈수록 더 해 진것을 두고 예수님은 칭찬하셨다. 이런 고백들에 바탕으로 한 진정한 사랑과 믿음과 섬김 그리고 인내를 보여 준 것에 대해 칭찬을 하고 계신 것이다.

우린 얼마든지 이런 고백 없이 사랑하는 척, 믿음이 있는 척, 섬기는 척 그리고 인내하는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23절 처럼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시기에 척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예수님은 속일 수 없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두아디라 교회가 그들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에 대해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은 주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고백 위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결과 임을 알 수 있다.

나중 행위가 처음 것 보다 많았다는 것은 계속 성장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생명 자체이시므로 예수를 바르게 믿고 예수를 계속 따르면 성장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예수 믿고 난 후 이러한 사랑과 믿음 섬기 인내 등이 성장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 고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하심 때문에 생명 안에 거하고 산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 인해서 하늘의 영광에 앉은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는가? 를 늘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잘 살고 못 살고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고, 지위가 높고 낮음에 관심을 안 두게 되고 인정 받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된다. 이미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얻은 자인데, 세상 것 때문에 아옹다옹하고 비교하고 시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주신 은혜를 고백하면서 살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살전4: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아는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마땅히 더 많이 행해야 한다. 어제 보다는 더 많은 행함이 있기를 바라고 오늘 보다는 내일 더 많은 행함이 있기를 바란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런 믿음에 근거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교회에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2. 예수님의 책망

20절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간음, 우상숭배) 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성도들이 당하는 위험은 상공인들의 조합에서 행해지는 우상숭배와 그 후에 이어지는 식사 문제였다. 이러한 조합이 중세 유럽에서는 길드(guild)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공인 조합은 오늘날의 노동조합과 비슷하다. 그들이 무슨 결정을 하기 위하여 모일 때는 그들 나름대로의 종교의식을 행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 그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었다. 성도들이 그런 식사에 참여함으로써 양심이 거리끼게 되는 것이다. (마치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돼지 머리 놓고 제사 드릴 때 돼지 머리에 돈 놓고 절하라고 하면 성도들은 불편을 느끼는 것 처럼) 그런데 어떤 여자가 이세벨 같이 성도들을 꾀어서 그러한 식사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이세벨은 북 이스라엘의 가장 엉터리 왕, 아합의 아내이다.

원래 두로 왕 엣바알의 딸이다. 그의 아버지 엣바알의 이름의 뜻이 ‘Baal with us’라는 뜻이다. 임마누엘 ‘God with us’를 흉내 낸 말이다. 이세벨은 그 바알 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신이 바알의 선지자로 열심히 이교 사상을 가르치고 바알 신앙을 전파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켜서 이세벨의 수하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리셨다. 그런데도 이세벨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협박했다. 결국 이세벨은 예후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개의 먹이가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모두 도륙을 당했다. 만일 두아디라 교회에서 그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바로 그렇게 처참하게 심판해 버릴 것이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셨다. 구약 성경을 훤히 꿰고 있었던 당시 사람들은 금방 그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세벨은 그렇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며 술수를 행하던 자칭 선지자였다. 주님은 그 이세벨의 가르침에 넘어간 자들을 책망하셨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교 신앙이다.

대개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은 남신과 여신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남신과 여신이 금슬이 좋아 자주 성적인 관계를 가지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때에 맞추어 비가 내리고 양이 새끼를 잘 낳고 자녀들이 낙태하지 않게 된다는 등 터무니없는 미신을 신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신전에는 처녀로 들어가서 신도들과 함께 제사를 지낸 다음 술을 마시고 취하게 한 다음 음란한 행위를 함으로써 신들이 성적인 감동을 받게 하려고 인간들이 몸소 시범을 보이는 춤을 추고 더 심하면 신전의 여자 사제들과 성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곳에 성도들이 출입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자칭 선지자라고 하면서 성도들을 꾀어 그러한 음행을 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다. 그래서 회개를 촉구하면서 기회를 주었는데도 지금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럼, 왜 이세벨 같은 사람의 꾀임에 넘어갈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세벨의 꾀임이란 모두가 인간을 좋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인간을 좋게 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증거이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리스도를 좋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을 좋게 하는 것은 악으로 보게 된다. 인간을 좋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유대인을 좋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죄 없는 줄을 알면서 죄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과 같다.

십계명에서 2계명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볼 때 우상이란 자기를 위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행음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했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꾀였다는 것이 된다. (풍년이 들고 부자다 된다는데 잠시 행음하면 어떠냐? 하나님만 신이냐? 우상도 그럴 힘이 있다. 더 많은 수확을 얻으면 더 돈을 많이 벌면 거기서 일부를 떼 내어 너희가 섬기는 교회에 바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인간을 좋게 하는 맘을 불어 넣었다는 것이다)

인간을 좋게 하는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을 좋게 하는 가르침을 악한 것으로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은 무조건 인간을 좋게 해주기 위한 말씀이고 하나님도 역시 인간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인용해서 인간의 복지를 말하고 인간에게 주어질 혜택을 가르칠 때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 오늘날 우리 가운데, 예배는.. ‘내가 즐겁고, 내가 기쁘고, 내가 위로받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며 이렇게 은연중에 ‘사람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자들이 ‘은혜 받았다’는 말도, 이제 거의 ‘내가 듣고 보기에 좋았다’는 뜻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 각자의 죄가 양심에 드러나서.. 얼굴이 붉어지고, 불편해져야 된다. 때때로 우리는, 말씀에 나를 비추어, 통회하는 슬픈 심령이 되어야 한다.

(소원성취 목적의) 새벽 기도, 백일 작정 기도.. 이건 다 미신적이다. 이걸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이세벨을 용납한 것에 대해서 책망하시므로 교회는 이세벨과 같은 가르침에 있다면 절대 용납하지 말고 그 즉시 버려야 한다. 용납한 이유는 그의 가르침이 그리 파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세속 주의와 물질주의의 도전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유럽교회의 쇠퇴를 보여주는 영국의 상황은 지금의 한국교회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영국의 앤디 하트로프 교수는 경제 발전으로 인해 영국의 기독교 신앙이 무너지고 있다며, 한국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날 ‘세속 주의와 물질주의의 도전에 대한 대응’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앤디 하트로프 교수(영국 옥스퍼드 선교대학원)는 오늘날 세속화의 영향으로 영국인들에게 기독교와 교회가 무의미하게 됐다고 역설했다.

그는 “영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은 일과 여가생활, 가족과 친구, 휴일, 사회적인 매체들과 관련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영화와 음악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명성을 추구하면서 이와 비슷한 다른 활동들을 한다"라며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포함돼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영국에서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트로프 교수는 “(영국에서) 기독교와 교회는 무의미하다. 그것이 바로 세속화의 영향”이라며 “교회를 향한 아주 심각한 하나의 도전”이라고 덧붙였다.

영국에서 여가시간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달라지면서 눈에 띄는 변화는 주일예배 참여율이다. 몇 십 년 전에 비해 참여 횟수가 줄어들고 불규칙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하트로프 교수는 ‘사람들이 주말에는 다른 일들을 하느라 점점 더 바빠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주말에 스포츠 활동에 참여하거나, TV를 시청하거나, 가족여행을 떠나거나 특별한 체험을 한다. 물론 이런 일들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다. 문제는 물질주의라는 수단을 통한 세속화는, 공동예배를 가장 중요한 일로 삼는 대신에 ‘하나의 선택할 수 있는 특별한 것’으로 삼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쉽게 만든다는 점이다.

기독교 신앙은 영국에서 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는 그것이 이루는 데 도움을 준 경제적 발전 때문에 계속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트로프 교수는 “물질주의는 세속화가 하나님과 기독교를 사람들의 사고와 삶에서 변두리로 몰아내버리기 위해서 이용하는 수단”이라며 “가장 당혹스럽고 걱정스러운 것은, 경제적인 발전이 하나님과 기독교를 삶의 변두리로 내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경제적 발전을 장려하는 데 우선적으로 도움을 준 것이 기독교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이런 이세벨 같은 자들을 반드시 가려내어 쫓아 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3. 남은 자에게 예수님의 권면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그러면 새벽별을 주리라 (24, 25, 28)

남은 자(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들)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칭찬과 격려를 듬뿍 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두아디라에 남아있는 자’ ‘남은 자’라고 하셨다. 그들만이 진짜이다. 그들만이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나은 자이다. 굳이 성경이 그 사람들을 남아 있는 자들이라고 표현을 한 것은 두아디라 교회의 대다수가 가짜였다는 말이다.

24절부터는 주님께서 바로 그 남은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모두 무가치하고 무자격한 자들이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한 은혜를 입은 남은 자들이 두아디라 교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받은 복음, 그리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생긴 것, 그들이 칭찬 받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말한다. 그것을 “굳게 잡으라."라고 말씀하셨다. 굳게 잡으라는 것은 가만히 서서 자기 방어나 하라는 말이 아니다. 진보와 발전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 백성이 된 남은 자들아, 너희에게 이미 주어진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점점 자라가게 하나이다. 이미 완성품으로 주어진 너희의 것을 점점 확인하고 깨닫고 누리라이다. 내가 올 때까지, 매일 매일 오늘 주님이 오신다는 마음으로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러면 새벽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새벽별을 받는다는 의미는? 새벽별은 동이 트기 전에 빛나는 별이다.

(계 22:16)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누구일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이 오시는 날 광명의 새날이 오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면 공중 들림 당할 것을 말한다. 하늘에서 주님을 맞이하는 영광의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 계신 남은 자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졌다. 여러분은 그 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그 분과 함께 이 광야의 삶을 통과하고 있다.

외롭다고 생각될 때 너무 힘이 든다고 생각 될 때 절망과 좌절의 구렁에서 이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 될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을 의지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순종과 섬김과 사랑과 인내와 겸손으로 세상을 굴복시켜 나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