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 - 요한계시록 2장 8-11절

차작가 2023. 11. 19. 12:58

서머나 교회 배경:

에베소에서 35 마일 떨어진 항구 도시로 부유한 도시이다. 에베소는 현재 사막이지만 서머나는 현재 20만 인구의 도시로 남아있다.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환난과 궁핍>

1) 사회로 부터 받는 핍박과 궁핍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받는 궁핍도 포함된다. 당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받는 궁핍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들은 당시 상인들의 조합이었던 길드 조직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길드 조직은 상인들의 연합 집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업의 번창과 무역의 흥왕(興旺)을 위해서 제사를 자주 드렸었다. 사업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내는 것과 같다. 게다가 일 년에 몇 번씩 Trade Guild Festival이라는 것을 열어서 열심히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었다. 그리고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거두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은 그 돈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길드 조직으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장사도 못하게 되었다. 생계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심지어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더더욱 기독교인들이 미움을 받은 것은 기독교인들이 시이저 황제를 섬기는 신전에 내야 하는 돈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의 경제를 움직이는 돈의 절반 정도가 신전을 운영하는데 쓰였다.

그래서 거기에 필요한 돈을 거두어 들였는데 기독교인들은 돈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시이저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돈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미움을 많이 받았었다. 특히 서머나는 로마에 가장 충성을 했던 도시였다, AD26년에 로마가 티베리우스 신전을 세우기 위해 11개 도시를 놓고 심사를 해서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를 뽑아 신전을 세웠는데 그 도시가 서머나였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감히 그 충성스러운 도시에서 황제를 섬기지 않겠다고 나서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는가?

예수를 믿음으로 해서 서머나 교회 사람들은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 것이다.

AD81-96년까지 도미티안 황제가 로마를 다스릴 때는 더 심한 박해가 있었다. 도미티안은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고 신처럼 숭배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는 자들을 잔인하게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시켰다.

 

2) 교회 내 믿는자로 부터 오는 환난도 포함된다.

그 환난과 궁핍이 누구 때문에 주어진 것이냐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신자가 아닌데도 '우리 신자다'라고 고집부리는 자들이다.

서머나 교회는 둘로 구분되었다.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탄의 회당) 사람들이 있고, 이들에 의해서 환난과 핍박을 받는 자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부유한 자다>

분명 장사도 못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사회조직이나 교회 내 사탄의 회당으로부터 핍박도 받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 말려 주시기는커녕 ‘사실 너희는 부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럼 성도의 ‘부’란 무엇일까? 성도의‘부’는 절대 이 땅에서 가지는 ‘소유’가 아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부’라고 하지 않는다.

(눅12:21)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이야기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이다. 한 부자가 밭에 소출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다가 창고를 더 크게 지어서 쌓아 두기로 하고 자기 스스로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했다. 그렇게 많이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자는 진짜 부자가 아니다’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 하나님이 ‘부요치 못한 자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 3:17)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부자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너는 가련하고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그들 보고 가난하다고 말씀하셨을까? 성경이 말하는 ‘부’는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부’는 무엇일까?

(히 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 순종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손해 보는 것이 우리의 재물이다.

이 땅에서의 하늘의 부요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사느라 조금 손해 보고, 핍박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아내는 그러한 사람이 부요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만이 진정 모든 풍요의 원형인 하늘의 것을 영원히 누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 때문에 가난해지고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너희가 실상은 부요한 자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은 참 그리스도인들을 진짜 부자라고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그분을 유산으로 받은 자들은 그 하나님의 모든 것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을 ‘부자다, 부요하다’라고 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땅에서는 환난 속에 던져지고 궁핍 속에 던져지게 된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공격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힘들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네가 예수로 인해 환난을 당하고 예수로 인해 궁핍한 것을 보니 너는 진짜 부자 맞구나’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고전 3:21)

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교회야 잊지 말아라,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엡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약 2:5)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 같아 보여도 그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는 진짜 부요한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다면 지금 있는 것이나 앞으로 올 것 모두 우리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요한 자들이다. 이 땅에서는 비록 환난과 궁핍의 모습이라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워 가는 자들을 ‘부요한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고난>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고난을 이야기하신다. 지금도 환난과 궁핍 속에 있는데 그걸 말려주시기는커녕 거기다 보태서 앞으로 또 환난을 주신다고 하신다.

(계 2:10)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너희를 시험할 텐데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십일’이라는 것은 그 시간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환난의 분량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그 분량을 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험의 분량을 채워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 할 훈련을 다 받지 못하고 회피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그것과 같은 크기의 환난이 반드시 우리에게 닥친다. ‘십일’이라는 완전수의 기간을 우리는 반드시 채워야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잠시이다. 십일이라는 말의 의미는 ‘끝이 있다. 짧은 시간이다’라는 의미도 있다. 그 환난의 시간, 궁핍의 시간은 우리가 영원히 누릴 하늘의 삶과 비교하면 잠깐이다. 그 잠깐의 고통이 영원을 준비하는 훈련의 시간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다고 말한다. 즉 예수님의 고난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주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진 것이라면, 또한 그 교회의 지체가 바로 우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지체가 몸의 고난에 대해서 외면한 채 자신의 편안함만 추구할 수 있겠는가? 주님의 몸 된 교회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항상 남다른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내 편안함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더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라>

 

(계 2:10)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리고 설령 사탄이 너희를 공격하더라도 너희는 ‘죽도록 충성하라’라고 명령하신다. ‘죽도록’‘아크리 따나투’는 ‘죽게 되더라도’이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10절의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죽어라'라는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충성을 하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것이다. 이것이 충성이다. 8절의 말씀대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신자는 바로 그분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에 죽었다가 사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죽음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데 고난인들 두려울까? 이것이 세상사고 방식과 맞지 않다. 편안함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라'라고 하고 '죽어라'라고 하는데 누가 이 말을 환영하겠는가?

현대 교회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 덕분에 살려고만 한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를 도와서 죽어가다가도 살아나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다 쓰러져 가다가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기적적으로 일어나는 것만 기대하고 있다. 쓰러져 가는 자를 더 쓰러뜨려 버리는 하나님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다.

이런 현대 교회인들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마지막에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관심거리나 되겠는가? 또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예수님의 고난에 관심이 있겠는가? 오로지 관심은 내 한 몸 고생 안 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을 가지고 '우린 믿는 자다'라고 스스로 자처하고 있다. 이런 무리들 속에 '예수님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고난도 마다하지 말고 받아라'라는 말씀이 주어졌다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죽을 각오로 충성되게 산 사람들>

다니엘 실제로는 폴리캅:

AD156년이면 요한 계시록이 쓰여 진지 60여 년 후이다. 당시 서머나 총독이었던 스타티우스는 어려서부터 서머나 감독이었던 폴리캅과 친한 친구였다. 그 친구는 폴리캅을 살리기 위해서 원형 경기장 안에서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그에게 물었다. ‘예수를 한 번만 부인하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그때 폴리캅이 그 유명한 말을 했다. 우리 주님은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우리 주님을 모른다 할 수 있겠는가?

그때 폴리캅이 총독에게 ‘너는 지금 잠깐이면 타다가 꺼질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죄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너는 어찌 피하려 하는가?’ 하고 오히려 그 총독을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는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겨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저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의 이름으로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영광이 이제부터 영원히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기도하고는 ‘뭘 하고 있는가? 어서 속히 너의 할 일을 하라’

그렇게 환난과 궁핍을 이겨낸 자들에게 무엇이 약속되어 있나?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이 무엇인가? 불타는 지옥, 그것이 바로 둘째 사망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려져서 둘째 사망, 지옥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사탄은 이렇게 환난과 궁핍을 통해서 교회를 시험할 것이다. 그때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한 두려움과 염려와 좌절에 빠져버린다면 우리는 사단에게 지는 것이다. 이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 지금 허락하고 계신 좋은 것이다. 힘을 내야 한다.

 

장차 환난이 있을 것인데 그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기는 자는 둘 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이 위로이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죽어라'라는 죽어라'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실 위로의 말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고 안심하고 두려워 말고 죽어라'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을 위로이다. 죽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둘째 사망 즉 멸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이라는 이 말씀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게 만든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분명 이 말씀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교회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시는 일로 생각해야 한다. '살려고 하지 말고 죽어라'는 이 말씀이 이 순간 이해가 되고, 또 내 인생이 그런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그렇게 살고 있느냐 못 사느냐는 것은 주님께 맡기자. 이 시간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과연 세상에 대해서 죽는 자로 살아가도록 나를 도와주시기를 바라며 주님을 찾느냐는 것이다. 그런 소원이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 것이고, 환난을 당하고 궁핍하나 부요한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