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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교회여! 다시 깨어나라! - 요한계시록 3장 1-6절

차작가 2023. 11. 19. 12:54

도입: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인도 독립을 이끌었던 비폭력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가 한 말이다. 간디 눈에 비친 영국 크리스천들의 모습이었다. 인도 정복자 였던 크리스천들은 인도 땅에서 무자비하게 땅과 재산을 약탈했었다. 수 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부리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다. 간디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도 예수를 닮으려는 자도 아니었다. 우리를 향한 메시지도 된다.

본론:

사데 지역의 역사적 배경

‘사데’라는 지방은 고원지대이다. 그래서 그 도시 전체가 요새화되어있다.

산 위에다가 성을 쌓고 남쪽 한 군데에만 입구를 만들어 놓아서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이 난 도시이다. 그렇게 도시가 요새화되다 보니 그 성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이 되어서 그 주변에 위성도시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전체를 다 합쳐서 ‘사데’라고 불렀다. 그래서 헬라어 원어에도 그렇고 영어에도 복수로 sardis라고 표기하는 것이다. 사데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다. 도시 아래로 흐르는 팍톨루스 강에서 사금이 나고 있었고 그 사금 덕에 최초의 금화를 주조한 도시였다. 그리고 허무스 평야의 풍요로운 농산물도 사데의 부에 일조를 했다.

 

1. 하나님의 일곱 영(성령)과 일곱 별(천상의 교회)을 가지신 이(예수님)가 말씀 하심.

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I know your deeds’라고 하셨다. 거기에 행위(아르곤)가 복수이다. 사데 교회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위들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데 교회더러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다’고 1절에서 말씀하셨다.

2)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명성)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활동을 많이 하고 부흥하면 그것을 살아있는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살았다고 착각하고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사데 교회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만큼 부흥하는 교회였고 활동적인 교회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사데 교회를 '죽었다'라고 평가하셨다.

엄청나게 멋지고 커다란 예배당이 있었고 많은 교인들이 있었다. 사데 교회는 인기가 있었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교회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사데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라 불렀다. 그런데 주님은 실상은 네가 죽었다고 하셨다. 행위가 풍성했는데 죽은 행위들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데는 아주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에 시민들 전체가 도덕적으로 아주 문란했다. 사데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로 인정도 받고 인기도 얻고 유명했지만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배당 밖에만 나가면 그 도시의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문란한 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들의 행위를 겉만 번드르르한 죽은 행위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데 교회에게서 2절에서 처럼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하셨다. 이것이 사데 교회가 '죽었다'라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이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름만 살았지 실제는 죽은 교회 죽은 성도가 될 수 있다. 남들 보기에 살아있는 교회 살아있는 성도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교회 죽은 성도 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한 사람이다. 그런데 얼마나 주인을 자주 바꾸는지 모른다.

2. 예수님의 권면

2절에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

1) 일깨어(wake up):

헬라어의 현재형은 계속적인 진행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바른 해석은 ‘계속해서 깨어있어라’라는 뜻이다.

2)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깨어있지 못한 자들은 완전히 ‘죽은 자’ 아니면 ‘죽어 가는 자’이다.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 (새 번역)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죽어 가는 남은 자’라는 표현을 하신 것으로 보아 사데 교회에는 겉만 번드르르하게 종교행위를 하는 죽어있는 자들 틈에 그들과 부화뇌동해서 남은 자이면서도 죽어 가는 자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3) 굳건하게 하라:

주님은 총체적인 영적 괴사 상태로 죽어가고 있는 남은 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라’ ‘스테리조’ ‘확고부동하게 고정하고 확립하라’고 경고하셨다.

완전히 죽었다면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한 갈대를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이라도 굳게 하라고 권면하신다.

3. 예수님의 질책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1) 행위의 온전함이 무엇일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온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구상의 모든 교회는 '죽었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신자니까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전하지 않는 것은 받지도 않으신다. 우리에게 행위의 온전함이 없다면 우린 죽은 자이다. 희망 없는 자입니다.

2) 이유:

우리는 오지 예수 안에서만 온전해 질 수 있다. 왜냐면, 죄 없으신 분,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이 죄인으로 헤아림을 입고 죽으신 그것이 곧 온전과 거룩을 그대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온전과 거룩을 예수님이 이루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온전함과 거룩을 요구하실 때 우린 누구를 앞세우면 될까? 예수님이다.

예수님만 의지하는 상한 심령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앞세울 때 그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온전한 자로 여겨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데 교회에서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만 앞세우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 된다.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보고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있다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인해서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그것이 행위의 온전함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없이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형식적인 행위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네 행위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행위의 온전함이란 자신의 행위를 모두 악한 것으로 보고 오직 온전하신 예수님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마음으로 행동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 행동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4. 예수님께서 해결책 제시하심

(3절)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1)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복음이다. 그들이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는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들었을 때였다. 어려운 가운데 복음을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영적으로 침체될 때 처음 복음을 들어서 믿음이 생겼을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처음 복음을 받아 들였을 때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면 '네가 잘나서 믿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총인데 끝까지 그 은총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살지 못하고 인간의 힘을 앞세우고 인간의 재주를 자랑하고 자기가 잘나서 된 것처럼 여기는 그것이 바로 온전함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보고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는 심정으로 사는 자는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행악으로 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회개하게 된다.

2) 그 때를 기억하면 회개하라는 것이다.

변질된 마음을 회개하는 것이다.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회개하라는 것이다.

5. 예수님의 경고

(3절)만 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1)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남아있지만 죽어 가는 것처럼 사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이 처음 받았던 복음을 기억하고 지키고 회개하여 깨어나야 한다.

2)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이런 말씀을 하게 된 배경:

사데 지역 사람들에겐 하나의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두 번 완전히 파괴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BC549년에 우리가 잘 아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그리고 BC218년에 안티오쿠스 대제에 의해서 점령당했다. 그런데 두 번다 하룻밤 사이에 반대편 절벽을 타고 넘어오는 게릴라전에 의해 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로마의 아시아도의 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밤사이에 도적같이 침공해 온 적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망한 전력이 있는 사데 교회에 예수님께서 편지를 보내시는 것이다.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은 그런 사데 도시의 배경을 들어 그들이 이해하기 쉽게 경고를 하시는 것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안전하겠지, 평안하겠지’ 그렇게 사데가 그렇게 자기들의 난공불락의 성을 믿고 있다가 15명의 특공대에게 속수무책으로 하룻밤 사이에 자다가 당했다. 깨어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만일 잠에서 깨지 않으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구원을 잘 이해해야 한다. 구원에는 세 시제가 있다. 이 구원의 세 시제가 헛갈리면 사데 교회처럼 죽은 행위들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창세전에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고 있고 이제 장차 완성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구원은 회심과 성화 영화를 다 합쳐서 구원이라고 한다. 신분적 운명적 영적인 면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홍해를 건넌 것뿐이다. 이제 우리는 광야(현재)를 거쳐 가나안(미래)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한번 시작하신 것은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 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광야를 가면서 구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already 구원을 받았고 not yet 아직 구원을 받고 있는 것이며 이제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구원받은 자들은 지금 그 구원받은 자답게 살고 있어야 한다. 천상의 교회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낮이 되었는데도 밤처럼 사는 자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살아난 자로서의 감사와 감격의 삶이 나와야 하는데 여전히 죽어있는 자들처럼 살고 있는 자들이 있다. 이젠 깨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엄히 경고하고 계신다. 남은 자들은 그 경고가 들릴 것이고 아닌 자들은 계속 그렇게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종말과 심판을, 그리고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종말론 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깨어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늘 주님이 오실 지도 모른다.'라는 마음으로 오늘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

6. 죽어가는 사데 교회가 희망이 있는 이유 4절

1)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소수)이 네게 있어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성결한 자, 세속에 물들지 않은 자, 예수만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2)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누가 흰 옷을 입는가?

계 6:9-11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6: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굳게 붙든 자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증거를 그들의 삶 속에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합된 삶을 살아내게 되어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 그의 인생에 증거로 보여 지게 되어있다. 이런 사람들이 흰 옷을 입은 자들이다.

3)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유: 주님의 삶에 연합되어 주님의 고난의 흔적을 몸에 지닌 사람들이 합당한 자요 흰옷을 받을 자들이다.

7. 죽어가는 사데 교회에 약속하심

(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1)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무엇을 이긴다(극복한다)는 것인가? 믿음을 지키고 자신을 지켜 나가 마침내 승리하는 것이다.

흰옷은 결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옳은 행실에 의해서이다. (계 19:8)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

빛나고 흰 세마포가 무엇일까?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흰옷은 그렇게 입혀진다. 환난은 누구는 통과하고 누구는 지나가고 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우리들의 삶에 바른 말씀에 근거한 그런 옳은 행실이 있나? 그 옳은 행실로 말미암아 핍박을 당해 보신 적이 있나? 없다면 회개해야 된다. 그리고 깨어나야 한다. 주께서 권면 하실 때 깨어나야 한다. 아니면 도적같이 우리에게 종말이 닥치게 될 것이다. 고난과 수고가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게 합당한 자들의 삶이요, 흰옷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말고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

그러한 자들을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시겠다고 하셨다.

2)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본문 5절)

주님이 시인하시겠다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살았나? 사람 앞에서 주님을 삶으로 입으로 시인하며 산 사람들이다. 단순히 입으로 가 아니라 삶으로도 주 예수가 나의 주인임을 살아낸 자들을 말한다. 그러한 자들은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면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사람도 있다는 말일까? 아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해 놓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게 만드시고야 마시지,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신다는 결연한 확인이다.

결론:

누가 죽은 성도인가? 간디의 말 처럼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 진돗개보다 못해 주인을 자주 바꾸는 사람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오늘도 우리 주님은 깨어있으라 그리고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길 원하나? 주님을 주인으로 시인하고 있나?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