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참된 예배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 - 시편 84편

차작가 2023. 11. 21. 13:31

도입:

한국의 남자라면 대부분 이런 경험이 있다. 군사훈련 때 예배를 가지 말라고 할 때 겪는 어려움과 예배 가려고 궂은 일을 해야 했던 경험이다. 어떤 사람은 잠시 쉬거나 자려고 교회에 가는 경우도 있고 혹은 초코파이 먹으려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군사훈련 2주 만에 예배 참석할 때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것을 생각 할 때 오늘 이 시편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시편 기자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편 기자는 고라 자손이다. 고라 자손은 성전 문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이 시편을 지은 시편 기자는 아마도 주의 집에 거할 수 없는 형편이었는지 모른다. 저자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포로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나라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시편 저자가 그런 형편에 있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쓰인 주의 장막, 주의 제단, 주의 집은 모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와 제사를 드리던 성전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신앙의 중심이었다. 성전에서 제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찬송했으며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현재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성전이 유대인들에게는 삶의 중심이었다. 그런 점에서 성전에 갈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의 집에 거하는 것 자체가 복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본론:

그래서 시편 기자가 주의 집을 향한 시편 저자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다음의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1절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How lovely is your dwelling place) 사랑스러운 표현

2절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쇠약할 정도로 사모함) 상사병과 같은 것이다. 병이 날 정도로 원하는 것이다. (너무 하고 싶는데 하지 못하면 너무 낙심해서 병이 난다. 가고 싶은 대학을 못 갔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나 거부 당했을 때 병이 난다)

3절 장막에서 집을 짓고 사는 참새(시 102: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제비를 부러워 할 정도로 사랑함. (사랑하는 사람의 집에 사는 강아지가 부러울 정도) 얼마나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했으면 거기에 사는 새까지도 부러워했을까?

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문지기라도 좋다 (Living in a humble position in God’s house is better than living a good life with the wicked) 고라 자손의 임무가 성전 문을 지키는 것임을 드러냄. 스펄전 목사님 ‘하나님의 최악이 사탄의 최선보다 낫다’

왜 이렇게 주의 궁정을 사랑할까?

주의 궁정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집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왜 예배를 사랑할까? 하나님을 만나는 기대 때문이다. 그럼, 어떤 하나님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죄 용서함이었다. 성전 안에는 지성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속죄소 즉, 죄 용서하는 곳이 있다.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신앙의 중심이었다. 성전에서 제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찬송했으며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성전이 유대인들에게는 삶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편 기자는 11절에서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신다;고 고백했다.

1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은혜는 죄 용서(죄 사함)를 뜻한다. 마땅히 죄 값을 치러야 하는데 그 죗값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 은혜이다.

영화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이다.

해 => 죄를 드러낸다. 감출 수 없다. 다 토해내게 된다.

그래서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므로

이런 죄 사함의 확신이 있으면 이젠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다시는 나의 과거의 죄를 들추거나 공격할 수도 없고 부끄럽게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의 방패 되신다는 것이다.

12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을 주시는데 구체적인 것이 4~9절에 나와 있다.

그럼, 이렇게 주의 궁정을 사모할 때 가지는 유익

4절 행복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이 복이 있으므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제사장들도 아니고 교회 모여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배 중심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기쁨을 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주의 궁정을 사모할 때의 유익은 계속 찬송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의 집에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있다.

그 긍휼과 자비에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주의 집이다. 따라서 저자는 주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 돌리는 사람으로 거할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여겼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모든 관심이 자신을 향해 있다. 때문에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지 않으면 항상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한다면 그것은 내가 원하는 나를 내려놓았을 때 가능하다.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에게 초점을 두었을 때 (이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찬송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찬송이 주의 궁정, 주의 집에서 있게 된다.

5절, 7절 힘을 얻는다. 7절 힘을 얻어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5절을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한다. 주께 힘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께 힘을 얻는 경험을 한 적이 있나? 신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자신의 의로는 생명에 도달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의는 보이지 않고 죄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상인데, 그런 실상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께 힘을 얻는다는 것은 이처럼 의의 문제로 접근을 해야 한다. 만약 이 말을 ‘어떤 일로 인해서 낙심을 하고 있었는데 기도를 하니까 힘이 생기더라’는 식으로 접근하게 되면 심리적인 느낌을 주의 힘으로 착각할 위험이 많다. 주의 힘은 심리적인 느낌이나 기분,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지갑에 돈이 없을 때는 힘이 빠지는데 두둑이 돈이 들어 있으면 힘이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께 힘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을 뜻한다. 주가 누구신가를 알기에 주가 없는 인생은 실패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께 소망을 두고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형편이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 믿는데 왜 그렇게 사냐?’라고 조롱을 받는 경우가 있다. 이런 조롱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가 나의 소망임을 믿으며 주를 바라보는 것이 주께 힘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고집이 아니라 주가 누구신가를 알았고 주가 없는 인생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사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5절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게 된다는 것 => 시온으로 예배를 드리러 순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자들이다. 기쁨으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하더라도 늘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을 6절에서 눈물의 골짜기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순례자들에게 목마름과 고통을 주는 메마른 골짜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순례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마음에 이미 시온으로 향하는 대로가 뚫려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안된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대가 ‘눈물의 골짜기’조차도 많은 샘이 솟는 소생의 장소들로 변화시킨다. 우리 인생 자체가 시온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자와 같다.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이 결코 순탄하진 않다. 사막과 같이 물이 없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험한 인생길에 우리의 눈물을 거두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6절 => comfort. 비는 성령을 상징하므로 순례의 인생길에서 성령의 인도로 샘이 아주 맑은 물로 채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편은 자유롭게 예배 드리지 못하는 성도에게 위로가 되고 자유롭게 예배 드리는 환경에 사는 성도들에겐 감사가 넘치게 하며 너무 자유로워서 오히려 예배를 등한시 하는 성도들에겐 경종의 메시지가 되게 한다.

시편 기자는 어떤 형편인지는 몰라도 성전에 갈 수 없는 형편에서 이 시를 지었다. 얼마나 가고 싶은지를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시편 기자가 그렇게 성전에 가기를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성전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예수님 때문이다.

시편 기자가 애타게 찾던 성전을 우리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9절)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할 뿐만 아니라 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 마음에 늘 하나님을 향하는 대로가 뚫려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일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지를 늘 돌아봐야 한다.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럴 때 현재의 모든 어려움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로 변화될 것이다. 날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영광과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결론:

우리는 지금 무엇을 사모하고 있나? 우리는 돈이 없으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돈을 원한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해서 멸망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돈이 없어서 최악의 결과로 굶어 죽을 수는 있지만 그 영혼이 망하는 것은 아니다. 영혼이 망하는 것은 그 심령에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신자이다.

예수님이 없으면 그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믿는 신자라면 당연히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사모해야 한다. 내 인생에 돈은 없어도 되는데 예수님 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을 복 있는 자로 믿는 신자라고 할 수 있다.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한다.

주의 궁정에서는 한 날을 살아도 죄가 용서된 거룩한 자로 살게 된다. 하지만 다른 곳은 아무리 화려한 곳이라고 해도 용서의 은혜 밖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주의 궁정에 거하는 것이 분명 복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복은 주와 연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주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복 있는 자로 선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