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성령을 보내신 이유 - 에베소서 1장 17-19절

차작가 2023. 11. 21. 13:33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게 기독교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는데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오늘 이 시간 사도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소개하는 성령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에 대해 알아 보자.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로 소개하고 있다.

1.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까? 여기서 체크해 보자. 먼저, 여기서 “안다”는 말은 부부가 그냥 피상적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에 대해서 깊은 알음을 이야기한다.

사회에서 직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고급 정보에 접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정보는 아무나 접근해 갈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분은 따로 있다. 17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오신 성령이시다.

성령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는 크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 그 실체가 파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고전 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신앙은 그저 종교이다. 나를 위해 신을 찾게 되고 나의 일을 위해 신을 부르는 종교성만 남는다. 종교는 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다. 신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 일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만 가능하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신은 인간의 지식에 의해 조립된 하나님이므로 참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을 감싸고 있는 욕망에 의해 조작된 신일 뿐이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알게 하신 그 하나님만을 드러낸다.

그러면 내가 지금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인해 알게 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살아 있느냐 살아있지 않느냐?’로 확인할 수 있다. 성도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자기 존재는 지워지게 됨을 경험한다.

이것은 성령의 오심이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사람은 본래 육신적이어서 자기를 위해서만 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이 성령으로 인해서 갈수록 자신은 희미해지고 대신 하나님이 선명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성령은 예수님의 약속의 오심이다. 이것을 요 16:7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한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계속 세상에 계시면서 모든 일을 하시지 않고 굳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서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동일한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우리의 몸으로 오셔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함으로 믿음이 인간에게는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믿음 없는 인간을 위해 성령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해결하실 분은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 성령을 사도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했다.

그러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했다는 증거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을 사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도 신앙을 이러한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다. 열심히 한 것만큼 복을 받고 성령도 열심히 기도하고 원하면 받게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받게 되면 인간의 열심과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구원의 문제, 의의 문제, 용서의 문제 등등 하늘에 속한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늘에 속한 것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저 주신 은혜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알고 싶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오심으로 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성령이 없이도 은혜를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령 없는 자가 말하는 은혜는 땅의 것과 연결되어 있다. 땅의 것이 주어지고 땅에서의 일이 잘 되는 것을 은혜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으로 인해 알게 된 은혜는 하늘에 속한 것이고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을 존귀한 것으로 바라보며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한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신앙이 깊어진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에만 집중하게 되고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하게 된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성령님의 깨달음 없이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다.

성령만이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더하실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매일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2.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신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죄로 인해 어두워졌다. 눈은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은 기능을 상실 했다기 보다는 죄와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기능을 바르게 행사하고 사용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빛을 볼 수 없는 소경을 보면 렌즈가 없는 게 아니다. 빛이 망막에 도달해야 볼 수 있는데 그 빛을 차단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백내장을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눈이 어두워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죄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어두워진 눈에 비교 된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꺼풀 또는 백내장을 제거해야 한다. 백내장이 제거되는 순간 그는 빛을 알 수가 있게 되고 그 전처럼 볼 수 있게 된다. 죄 안에 있는 사람의 조건은 바로 그러하다. 렌즈는 멀쩡한 데 죄라는 베일이 그 위를 덮어 버린 상태이다. 빛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이 베일 때문에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 베일은 벗겨져야 하는데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너무 신기한 것은 예수 믿기 전에는 성경을 보아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예수 믿고 나서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바로 성령의 조명 때문이다. 마음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우리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 영적인 진리를 이해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임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3. 결과적으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 영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첫째: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이 인도하고자 하시는 길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 이것을 깨달은 성도는 새로운 소망과 영광과 능력을 구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을 알게 된 성도가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나를 마음에 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다.

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먹이시고 지켜 주셨다.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기를 원하셨다. 근데 철병거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쫓지 못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기를 원하시는데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고 했다. 이스라엘의 소명을 망각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이같이 불신앙의 사람이 된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를 살아갈 때 ‘나’는 자연히 포기될 수밖에 없다. 내 뜻보다는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더 존귀함을 알기 때문에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게 된다. 이러한 성도 됨을 위해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오셨다.

성령이 오심으로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결코 우리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 오시지 않는다.

둘째: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성도에게 기업은 무엇일까?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았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신 것은 단지 땅을 나누어 주시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증표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분배된 땅에서 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이 땅으로 향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이 분배하신 땅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자 하게 됨으로 인해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받은 기업의 풍성은 다른 사람보다 땅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그들의 영광이고 풍성이었다.

기업은 그 증거였기 때문에 풍성한 기업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즉 기업의 풍성은 많고 적음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존재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존재가 곧 풍성의 참된 의미였다.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잘 되게 하실 것이다’라는 기대를 갖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이 우리의 영광이 되고 풍성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의 확대로 인한 풍성은 믿음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욕망일 뿐이다. 믿음은 성도로 부름 받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영광되고 풍성한 세계에 들어와 있는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엡 1:11절에서는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고 말하고, 13절에서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은 우리가 영원한 기업을 얻었음에 대한 보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성령을 받은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받을 자라는 증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풍성한 영광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 된다. 이 같은 풍성함을 안다면 그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처럼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기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도구로 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성도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신앙은 철저히 자기 유익이 삭제된 세계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영광을 위한 도구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살아있어야 바른 신앙의 길로 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기업이 되게 하신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아야 한다. 영원한 영광의 가치를 알게 되면 자연히 그 영광이 풍성함으로 채워지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자기 유익은 포기해도 괜찮다는 고백이 있게 된다.

성도의 기도에서 자신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하늘 영광의 풍성함을 알지 못한 결과이다. 하늘의 영광보다 세상에서의 영광에 더 가치를 두고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라지지 않고 자기 유익이 중점이 된 기도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앎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복음은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된 사람으로 인해 전파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의 영광과 풍성함을 아는 것이다.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 감으로 삶이 기쁘고 평안케 되기를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