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기독교 핵심 교리 중의 하나는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생기는 게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아무리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 소리치고 또 믿음으로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결국 헛된 삶이다.
마 7:22-23절의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는 말씀을 봐도 아무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선언을 들을 사람도 있음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주의 이름을 앞세우고, 믿음을 앞세운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있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으며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워가야 한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히브리서 믿음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이 어떤 모습인가를 믿음의 인물들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우리 자신을 점검할 수 있게 된다. 모범을 보여 주면서 그대로 살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소유자는 이런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한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이다. 지난 시간에 아벨의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아벨과 같은 구별된 믿음이 있다면 아벨과 같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순종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렸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믿음을 주셨지만 순종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렸다.
본론:
사람의 인생을 단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이룬 대통령이다. 에녹도 그랬다. 바로,
1.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는가?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 한 줄 밖에 없다.
2.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었다.
동행은 마음이 맞는 사람과만 할 수 있다. 결혼 생활도 동행하는 삶인데 마음이 맞지 않으면 동행 할 수 없다. 에녹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생활을 했다. 동행의 첫 걸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행하는 사람 외에는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인류 절반의 이성을 포기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 외에는 바라 보지 않아야 한다. 즉, 세상을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첫걸음은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에녹이 그랬다. 그가 살던 시대가 어떠했는지는 유다서에 보면 알 수 있다.
1: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 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당시에 죄악된 모습에 대한 심판을 예언했다. 실제로 3대 후(므두셀라, 라멕, 노아) 노아 때 홍수로 인한 인류 전 심판이 일어났다.
동성 연예가 합법화하는 오늘과 같은 시대에 우리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바로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세상을 떠나면 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거부한다. 자기의 힘으로 살아 보려고 하고 자기의 뜻대로 자유롭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에녹처럼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동행하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3.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동행하려면 6절 말씀처럼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세상 만물의 주관자이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 성취되고 있음을 아는 자가 신자이다. 그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과연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은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신자는 이것을 믿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모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말씀의 세계가 곧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말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게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유다서 1:14-15절을 보면 “1: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15 이는 뭇사람을 심판 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라는 말을 한다.
이 내용을 보면 에녹은 뭇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심판이 있을 것임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것이다. 이처럼 심판을 믿는다면 경건치 않은 세상이 사는 것처럼 살지 않게 된다. 심판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사라질 것에 불과한 세상을 소망하고 세상을 힘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심을 믿고 심판이 성취될 것을 믿는 자의 믿음의 모습이다.
자기의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라 지은 것을 볼 때 에녹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다.
므두셀라는 ‘창던지는 자‘라는 뜻이다. 창을 던진다는 그 단어 자체가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그 이름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고대 시대의 전쟁에는 꼭 창던지는 자가 앞장을 서서 전쟁을 했다. 부족이나 마을에서 가장 창을 잘 던지는 자가 성 맨 앞에 서서 창을 던져서 상대방의 적장이나 중요한 인물들을 쓰러뜨리면 그때 주력부대가 공격을 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창던지는 자가 죽으면 그 전쟁은 진 것이나 진배없게 된다. 그러한 배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들으면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라는 개념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에녹이 자기 아들을 낳고 그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다는 것은 에녹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아들이 죽는 날 이 죄악된 세상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계시를 이미 받았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신 것이 노아가 600살 되던 해였다. 그때 무드셀라가 몇 살이었을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노아를 낳은 것이 182세이다. 그리고 라멕의 아버지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것이 187세이다. 합하면 369이다. 거기에 심판 때의 노아의 나이 600을 더하면, 969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났던 므두셀라의 손자 노아가 600살 되던 해는 므두셀라가 969세가 되던 해이다. 므두셀라가 몇 살에 죽었을까?
(창 5:27) 27 그는 구백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인 노아의 홍수는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일어났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로 정확하게 완성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 5장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다.
에녹은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며 살았다. 그걸 믿음이라고 한다. 아직 눈앞에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실체로 받아들이고 사는 삶을 믿음이다. 에녹은 바로 그 믿음의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 것이고 이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담하게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살다가 갔다. 그들이 바로 죄의 삯인 사망과 전혀 관계없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살게 되는 성도들이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부터 단 하루도 막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므두셀라가 감기만 들어도, 길을 가다 넘어지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그 아들이 죽는 날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매일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았을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 삶을 가리켜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른다.
바로 오늘 주께서 나의 종말이 올지 모른다는 그러한 절박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자들을 우리가 성도라고 부른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며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 애를 쓰는 삶을 살기에 그들을 가리켜 아버지와 동행하는 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어떠한가? ‘죽었더라, 죽었더라’로 끝나는 세상의 죄악 속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이 땅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졌다’는 에녹의 삶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살아도 되고 안 살아도 되는 그런 삶이 아니다. 반드시 성도에게서 있어야 하는 삶이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일까? 공의를 행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삶,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오래오래 기다려 주시면서 양육을 시키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우리의 동행자이신 하나님과 다른 길로 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의 죄악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계신다는 것은 의식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죄를 증오하고 더러움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에녹은 당시 살던 시대가 죄악에 관영한 시대였고 그런 시대의 죄악상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늘 죄와 싸웠고 더럽혀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이런 힘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올 수 있었을까? 바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에서 나왔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않는다. 요즘 한국의 상황을 보면 죄는 덮을 수 없는 것이고 결국은 드러나게 되는데 인간은 죄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죄를 저지르는 상황을 보고 있다. 그 속을 들어다 보면 다 냄새나고 역겹다. 이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면전 의식인 코람데오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을 지속 시킬 수 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 할 때 삶의 자세는 어떨까? 말 2: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입에 진리의 법 ~ 에녹이 그런 삶을 살았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올라가 자기들끼리 집단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도하기도 한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자식을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시작이 되어 영생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에녹은 자식도 없고 가정도 없고 직장도 없는 수도사가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의 아버지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한 집안의 가장이었으며, 한 부족의 족장이었고 패역한 죄인들 사이에서 열심히 전도를 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시작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살아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 영생의 삶,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을 살면서 그 삶이 주는 행복과 기쁨을 맛 보아야 한다.
(암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두 사람이 뜻을 합치지 못하고는 절대 동행의 삶이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생의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살펴야 한다.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동행을 하게 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이 자기를 뜨겁게 데우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는 것이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글로바와 마리아 두 제자가 예수님과 동행을 했다. 그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들에게 제일 처음 나타났던 특징이 무엇이었을까?
주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다. 두 번째로 나타난 특징이 무엇이었을까? 그 길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뛰어가 주님을 증거 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해 내기를 즐거워 할 뿐 아니라 에녹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증거하고 싶어 못 견디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하늘나라의 삶이다. 그게 바로 영생의 삶이다.
4. 또한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이었다. 이 믿음이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가게 했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 상은 하늘의 상이다. 에녹이 받은 상은 무엇일까? 에녹이 받은 상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 운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생명이다. 결국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의 생명이라는 귀한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이고, 이 믿음이라면 세상의 좋은 것을 상으로 여기거나, 또는 세상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믿음으로 살면 나중에 천국 가서 크고 좋은 집에 살게 된다는 엉터리 같은 말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상은 하늘의 생명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이미 그 귀함이 충족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을 외면하고 어떤 행위를 이용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벨의 믿음, 에녹의 믿음을 보면서 나의 믿음은 과연 어떤가를 살펴야 한다.
믿음은 나 자신을 보지 않게 한다. 어떤 형편에 살든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역할로 믿으며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힘쓰게 된다. 과연 이런 믿음에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고 믿음의 참된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결론:
우리는 성경에서 에녹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그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실보다는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것에 더 관심이 많다. 그러고는 ‘어떻게 하면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성도가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육신의 죽음이란 영생으로 통하는 문을 통과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사소한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도가 지금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죽음 뒤에 이어지게 되는 영생을 살고 있는 가이다. 성도는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나서 이미 영생의 맛을 보고 있어야만 영생으로 이어지는 승천을 할 수 있다. 이 땅에서는 주일날 예배당이나 대충 다니면서 살다가 천국에 가서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안 된다. 영생은,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이 땅에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 땅에서 성도가 살아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죄악 된 세상은 결사적으로 방해를 한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하는 꼴을 마귀는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것을 성도의 고난이라 부른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생을 살아야만 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다. 그 삶은 꾸준히 한 발 한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지 건너뛰거나 지름길로 혼자 갈 수 있는 것 아니다. 플라스틱 신드롬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인스턴트 세상은 모든 것을 단기, 속성 완성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신앙생활마저도 단기 속성으로 하고 싶어 한다. 기도도 40일 특별기도, 100일 철야 기도 등의 단기 속성 기도를 하고 싶어 한다. 한 발 한발 걸어가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 어려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받아 단기 속성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반열에 오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신앙생활은 없다. 한 발 한발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인생 속에서 앞으로, 앞으로 꾸준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한 발 한발 꾸준하게 열심히 동행하다 보면 어느새 그분과 함께 하늘에서 동행하고 있는 우리를 자각할 때가 올 것이다.
이 땅에서 엄연히 살아 있던 에녹이 이 땅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 에녹이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바로 하나님 나라에 있다. 이 땅에서 한 발 한발 하나님과 동행하다 보니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녹아 오늘은 우리 더 좋은 곳으로 가보자, 오늘은 준비 단단히 하고 오너라‘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길로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평상시와 똑같이 동행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걸어 올라간 것이다. 그게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
그 분만 바라보자. 다른 것 바라보다가 자꾸 그 분과의 동행을 놓치게 된다. 사랑하는 애인과 동행하면서 자꾸 다른 여자를 바라보면 그 사람 기분이 어떨까? 그 관계는 곧 깨지고 만다.
우린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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