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마태복음과 다른 기술:
마태복음은 21장에서 이 사건을 기술 할 때 성전 청소 사건을 먼저 기록하고 나서 무화과 나무 사건을 기록했다. 그리고 따로 따로 기록했다. 반면에 마가복음은 시간 순서 대로 기록했다. 마태복음과 달리 무화과 나무 사건과 성전 청소 사건이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여기서 교훈을 얻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술했다고 본다.
열매 맺는 때가 아닌데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열매가 없다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고 말리게 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비판을 할게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본문 배경:
호산나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 입성 하신 후 성전을 둘러 보신 후 베다니로 가셨다가 아침에 다시 성전에 가시기 전에 무화과 나무를 보시는 상황.
본론:
1.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 하신 이유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자 나무가 말라죽은 얘기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 당시는 무화과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나무를 저주하시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과연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셨을까?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 등장한다. 그래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통해 곧 유대인들의 실상을 보여주고자 하셨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이자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시장하실 때 굳이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신 이유가 있다.)
무화과가 보통 열매 맺는 시기:
보통 열매는 3월 말 정도에 맛없는 열매로 시작해서 5월 말부터 익어 8월 말 부터 열매를 따기 시작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열매가 없다고 한 것은 완전한 열매가 아니라 처음 막 나오는 열매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런 무화과 나무를 향해 14절 처럼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예수님이 시장해서 무화과나무를 향해 가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향해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전을 둘러보니 원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저주받을 자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저주받을 자라는 것은 무엇으로 드러났을까? 이것은 당시 성전의 형편으로 알 수 있다.
2. 성전 청소 이유
성전의 본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성전은 장사하는 사람으로 넘쳤다. 즉 제사를 드리면서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종교 의식에만 목적을 뒀었다. 종교의식, 즉 종교 행위만 있으면 다 된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성경에 예언된 어린 양의 죽음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면 성전에 모여 제사를 드릴때 어린 양의 피가 아닌 제사 자체에 의미를 뒀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이 유지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죄의 용서도, 은혜도 다 팽개친 채 다만 제사드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이것이 바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의 실상과 같은 것이고, 곧 저주 아래 있는 것임을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셨다.
예배당이라는 건물을 두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는 건물인 성전을 고수하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성전을 찾아서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제사만 드리면 다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장사꾼들도 제사를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머물러 있었던 성전 신앙이다. 용서의 은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바친 제물이 아니라 온전한 제물로 오신 메시아가 흘린 피가 자신들을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에 있게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제사만 드리면 그것으로 신앙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잎만 무성한 유대인들의 신앙이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서 기대했던 열매의 의미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메시아로 말미암아 용서의 은총을 누림으로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이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존재 이유를 몰랐다. 성전은 제사라는 종교 형식을 지키기 위한 기능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나와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제사라는 의식과 형식을 지킨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은 결과였다. 즉 제사는 단지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 제사라는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사장 서기관 이런 사람들은 성전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다만 제사를 이용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고 했다. 이러한 욕망에 의해 장사꾼이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을 하시는 것이다.
18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라고 말한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는 그들의 일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죽일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반응은 지금도 여전하다.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고,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를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에는 주일에 빠지지 않고 예배 잘 드리고, 헌금하는 것으로 신자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근거로 당당하게 하나님께 복을 빌었는데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은 그러한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의 장사꾼을 쫓아내신 것은 제도와 의식을 고치고 개혁하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성전은 지금의 제도적인 교회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자이기 때문이다.
신자가 예수님께 나오는 이유는 오직 용서의 은총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의 용서가 멸망에 처해 있던 우리에게 생명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총을 감사하고 자랑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르면서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고, 세상의 복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께는 강도 짓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교회가 인간의 복을 위한 예수를 말하고, 믿음 또한 인간의 복을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 곧 교회가 강도의 굴혈로 존재하는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십자가로 끌어당겨 살려주셨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자기의 생명 얻음을 감사하게 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곧 기도하는 집이다. 예수님의 생명, 살려주심과 비교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나무는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은 죄로 인해서 이미 저주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창 3:17절을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은 이미 저주 아래 있는 상태임을 말한다. 그래서 땅에 속한 모든 만물은 그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이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착하게 살면 저주에서 해방되고, 악하게 살면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세상은 이미 저주 아래 있다. 그리고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서 죄로 인해 저주에 속한 것이 인간의 본질인데 그러한 인간에게서 구원의 근거가 되는 의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세상은 ‘착하게 살면 복받는다’는 자기 원칙을 가지고 ‘착하게 살았는데 왜 지옥 가는가?’라고 하나님께 반박을 한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세상에 속한 피조물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저주 아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기대하신 열매는 세상의 이치나 자연과는 상관없는 열매이다.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고통이 주어지게 되면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다. 열심히 했는데 고통이 주어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고 그래서 억울하다는 마음이 든다. 마치 ‘아직 열매가 없을 때인데 왜 저주합니까?’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무화과나무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항변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저주 아래 있음을 생각한다면 저주는 당연한 것이다. 때에 따라 열매를 맺었다고 해서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일이 주어지든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신앙생활을 잘했다면 그것은 주의 은혜이다.
신자는 다만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자신에게 어떤 고통이 주어지든 모든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고 있기에 가능한 고백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넘치는 용서의 은총만이 크게 보이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열매인 것이다.
3. 무화과가 저주 받아 마른 이유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예수님은 말라죽은 나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달리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어서이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이 곧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말씀하고자 하셨다. 그것을 성전에 장사하는 사람을 내어 쫓으신 것으로 보여주셨다.
성전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제물의 피로써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는 제사에 충실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백성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에 열심이었고 그로 인해 장사꾼이 성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제사를 반복해서 드리면서도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한 것이 못됨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은,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임을 생각지 않은 것이다. 다만 제사만 중지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친히 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셔서 구약의 모든 제사를 그치게 하는 온전한 제사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사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을 잊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제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가 친히 드릴 제사에 모든 희망을 두어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온전한 제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행하는 제사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사가 그들을 의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의 현실이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은, 예수님이 기대하신 열매가 없는 자의 결국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신자가 무엇을 얼마나 행하였던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내세우는 행함을 아예 보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증거는 절대로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에 대한 실천, 즉 행함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제물이 흘리는 피를 통해서 증거 되는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증거인 것이다.
결론: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믿음으로 인한 열매이다. 이 열매는 우리의 상식과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맺어진다. 즉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가능한 열매가 아니다. 믿음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타나야 하고 맺어져야 하는 열매이다. 때가 되어야 열매가 있고 때가 되지 않으면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내가 열심을 내면 맺어지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없는 그런 열매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믿음에 의한 열매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주에 있는 우리를 구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 은혜에 온 마음이 점령당한 채 이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있음을 고백하며 고통에서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신 열매이다. 이 열매를 우리의 능력으로 맺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의 열심, 능력과 상관없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 맺어지는 열매이다.
저주에 갇힌 인간의 실상을 보게 되면, 자연히 저주에 갇힌 나를 구출한 분에게 관심이 가게 된다. 내가 아닌 나를 건진 분에게 모든 관심이 가는 이것이 믿음의 흔적이다. 그래서 22절에서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신자는 자신이 무엇을 행하는가를 보지 않고 ‘내가 누구인가?’를 본다. 내가 누구인가를 보면서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실상을 보게 되고, 그러한 자신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의 크심을 알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신자는 이런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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