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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 시편 102편

차작가 2023. 11. 27. 12:54

고통은 이상하게 한꺼번에 밀려 오는것 같다. 오늘 시편 기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

시편 102편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던 한 시인의 탄식 시편이다. 표제는 ‘헌 곤고한 자의 기도. 그가 곤고하여 그의 탄식을 여호와 앞에 쏟아 놓을 때라고 되어있다.

그럼 어떤 고통을 안고 있는지 한번 살펴 보자.

102: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102:3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불이 자신을 태우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

102: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자신의 처지를 기울어지는 그림자와 시드는 풀에 비유함으로써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는 고통으로 표현하고 있다.

102:23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102:24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 하니이다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곧 죽을 것 같은 절박함을 호소하고 있다.

102: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중동의 뜨거운 태양 볕에 금방 시들어 말라버린 풀과 같이 된 것은 음식을 먹지 못해서 이다. 그래서 5절 처럼

102:5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102:6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102: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부엉이는 혼자 있고 참새는 무리 지어 다니는데 홀로 있다는 것은 무척 외롭다는 것이다.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밤을 새웠다고 한 것을 보면 밤을 새운 기도, 즉 철야 기도까지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102:8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육체적인 고통과 외로움 속에 원수들의 조롱까지 더해지는 상황을 묘사한다.

이렇게 자신의 고통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고통을 탄원하는 기도가 12절 부터는 갑자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러면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께서 고통에서 해방 시켜 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편에서는 탄원에서 찬양으로 이어지기 위한 중간단계, 즉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부분이 없다. 사망의 직전에서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다든가 나를 비방하는 원수를 물리치셨다는 등 저자의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

그런데 이어지는 12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은혜를 노래하면서 여호와를 높이는 찬양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시편 저자는 고통에 처한 자신의 탄원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높이는 찬송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저자는 고통의 삶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

이것은 저자가 탄원의 기도를 하자마자 하나님에 의해서 고통의 삶에서 벗어났다는 뜻이 되는데, 그런 식으로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고 멸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 응답을 의미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개의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기도 응답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기도한 내용대로 이뤄주시는 것이다. 백만 원을 달라고 기도했으면 백만 원이 자기 손에 들어오는 것을 기도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편 저자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이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셨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고통의 처한 저자의 처지가 기도를 함으로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저자는 고통의 현실이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고통의 처지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자신의 인생에 대해 실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행한 사람을 산다고 할 수 없다. 반대로 세상의 부와 영광을 누린다고 해서 자기 인생에 대해 감사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믿음의 길을 간다고도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성도에 대해 말하기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라고 했다.

사람은 누군가의 외적 조건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짐작하려는 습성이 있다. 외적 조건이 좋으니 행복할 것이고 외적 조건이 나쁘니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외적 조건에 의한 행복과 불행은 잠시 동안의 느낌일 뿐이지 우리를 행복의 길로 계속 인도하는 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외적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됨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102편 나의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10절에서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즉 저자는 자신이 처한 고통의 현실을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 같은 고통의 현실로 던져 넣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9절 처럼 ‘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다. 재를 양식 같이 먹는 다는 것은 회개를 뜻하고 눈물은 회개의 눈물을 말한다.

이처럼 자신이 처한 고통의 현실을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고통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게 된다. 가장 먼저 자신이 겪는 모든 고통을 죄로 인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 이게 된다. 이것이 고통의 삶에서 깨닫게 된 차원이 다른 신앙의 세계이다.

우리는 고통에 처하게 되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생각 없이 고통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와 분노로 자신을 고통에 던져 넣으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자신의 죄 문제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시편 저자의 탄원의 기도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탄원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주의 진노와 분노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탄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기도는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현실은 그대로일지라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됨으로써 찬양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성도의 감사와 기쁨, 찬양은 사실 외적인 삶의 조건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은혜를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 그 분량을 계산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주어진 삶의 외적 조건에 의해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풍요를 하나님의 사랑, 은혜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저자가 자신의 고통을 주의 진노와 분노로 바라보게 된 것은 13절에 나타나 있다. 이 사람은 “주께서 일어나 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결국 저자는 현재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17절에서 말하는 빈궁한 자의 기도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의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내 놓을 것이 없고 다만 긍휼히 여기시는 주의 은혜만을 바라보는 그 심령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의 기도를 들으신다. 아무것도 내 놓을 것이 없는 빈궁한 자의 기도, 하나님은 이 기도를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

빈궁한 자의 탄식의 기도에 하나님은 주의 긍휼을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응답하신다. 비록 삶은 고통의 처지에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배우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다. 즉 하나님의 최고의 응답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해결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는 모든 삶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다. 2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현실에서라도 항상 안전히 거주한다, 주 앞에 굳게 선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주의 긍휼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아 감으로 어떤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고 감사와 기쁨과 평강을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다. 그러니 모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면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