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마무리하면서 예루살렘 성에 왕으로 입성하신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사건이다.
1. 사람들이 유월절 때문에 모임 (12절)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신 이날은 잡히시기 5일 전이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잡히시기 위해서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오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준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죄인 된 인간을 위해 잡히시기 위한 구속사적인 의미가 부여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12절에서 ‘큰 무리’라고 말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 양이 256,500 정도가 유월절에 소비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략 2백7십만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 예수님에 대해 들은 것:
온갖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 17절에 이것을 목격한 증인들이 있었고 이들이 다른 무리들에게 증언했다.
이에 따라 이 무리들이 예수님을 맞으러 나오는 내용이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2.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 (12-13)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여기서 왜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고 흔들며 예수님을 맞았을까? 성경에는 종려나무에 비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징이 많이 나오는데, 이 나무는 승리(계 7:9), 번영(시 92:12), 아름다움(아 7:7,8) 그리고 기쁨(레 23:40)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가지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거룩의 상징이요 승리와 번영의 상징이었다.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있다. 주전 175년에 유대가 시리아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을 당했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황폐화되자 그들은 성전을 매음굴로 만들고 우상 숭배하는 곳으로 만들었었다. 그 모습을 본 마카디우스라는 사람이 참지 못해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전쟁을 마치고 마카디우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었다. 예루살렘을 재탈환한 그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유래된 행동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을 환영할 때 하는 행위였다.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입성을 환영한 것은 그를 왕으로 맞이한다는 표시인 동시에 그들 자신의 크나큰 기쁨을 나타난 행위였다.
겉옷도 폄(눅 19:36) =>왕하 9:13에 보면, 예후가 왕으로 취임했을 때 무리들이 자기들의 곁 옷을 벗어 길에 깔고 나팔을 불며 예후는 우리의 왕이라고 외쳤다.
또한 이렇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는데 여기서 호산나 이 말은 히브리어로 ‘호시아-나’인데 그 뜻은 시 118:25에 나와 있다.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우리가 기도하오니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구원일까? 바로 로마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한다.
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말은 그들이 주로 유월절 기념 때에 노래하는 시 118:26의 말씀에서 빌려 온 찬양 시 귀인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로서 예수님이 부인할 수 없는 왕적 메시아 이심을 찬양 한 것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조상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다윗 왕국을 다시 회복시킬 왕이라고 기대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메시아를 통해 얻어질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정치적인 자유를 얻을 것에 대한 기대 즉 현실적인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달라는 간절한 요청이었다.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을 세상적이고 현실적인 정치적인 왕으로 모시고 있다. 종려나무 가지를 신나게 흔들며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좋아질 거야”
물질적인 축복과 정치적으로 자유를 주는 분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의 관심은 항상 이 땅이다. 이 땅에서 얼마나 잘 되는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심을 둔다.
골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시 94:11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사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로 환호하는 무리들을 더욱 더 열광 시킨 것은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살릴 때에 현장에서 보았던 무리들의 예수에 대한 증거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지 4일 된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었다.(17절) 그래서 원근 각처에서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인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열광 한 것은 이 표적 행함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한다.(18절) 바로 이 때 종교적 지도자에 속한 바리새인들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터에다 이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예수님에 대한 군중들의 환호성에 이들은 더욱 당황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자 자신들이 예수님을 음해했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판단했으며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자신들에게서 떠나갔음을 알게 된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율법을 잘 알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일반 백성들과 어린 아이까지 모두 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찬송하고 환영했으니 그들의 하는 일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 것으로 판단 한 것 같다.(19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정작 깨달아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피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졌다. 먹을 것을 주고, 병을 고쳐 주는 신기한 사람 정도로만 피상적으로 알지,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기 원하셨던 것, 그 자신을 십자가에 드려서 산제사를 드린 후에 그를 믿는, 그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을 살리시겠다는 그 본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다.
사실 제자들도 잘 몰랐다. 그 당시 제자들은 기록자인 요한을 포함하여 모두가 16절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참된 의미를 몰랐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참된 의미를 몰랐다면 길가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며 호산나를 외쳤던 군중들은 정치적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줄 메시아를 찾았던 것은 당연했다. 그분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며 다스릴 영적인 메시아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신 다음이며(눅24:25-27,44-49) 승천하신 후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신 후였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해 잘못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착잡하셨을까?
그래도 예수님은 말없이 묵묵히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가셨다.
3. 예수님에 대한 옳은 관점 (14-15)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사람들이 왕으로 생각한다면 적어도 말은 타셔야지 나귀를 타신 이유는?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모든 일들은 한 사람이 만들어 낸 시나리오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메시아가 한 일을 인간의 힘으로 조작해서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분이 아니면 이뤄낼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한 것이지 자신이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행한 분이 아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주권과 신비를 인정해야 한다.
나귀를 탄다는 것은 평화를 상징한다. 오늘날 나귀는 무시당하는 동물이지만 당시에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왕의 동물이었다. 고대에는 왕들이 정복한 나라에 들어갈 때 평화를 상징하는 의미로 일부러 나귀를 타고 들어갔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을 의미한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나귀는 짐을 실어 나르는 동물이므로 섬김을 상징한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섬기려 이 땅에 오셨고 또 우리를 위해 우리의 짐을 지신 분이시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나귀를 타신 것은 겸손하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결론:
군중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물리치고 자신들을 그 압제에서 대항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열렬히 영접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성은 로마를 이기는 입성이 아니라 죄와 사망과 사단을 이기시는 승리의 입성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마귀는 결국 패했다. 죄가 세력을 잃었다. 사망 권세가 깨어졌다. 그래서 십자가를 향해서 나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영광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아가는 발걸음이었다.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예수님은 이 세상의 정복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분을 열렬히 환영하고 영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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