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셔서 씨름하시는 내용이다. 아마 야곱의 일생에서 가장 많이 언급 되는 내용일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야곱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이다.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5: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야곱을 찾아와 씨름하셨다. 따라서 야곱의 씨름은 야곱을 위한 씨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하나님의 씨름이었다.
먼저 야곱의 씨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생각해 보면, 야곱의 씨름을 대부분 기도로 해석하고 있다. 야곱이 밤을 새워 하나님과 씨름하고 이긴 것을 기도의 씨름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야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해석해 버린다.
26절의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구절을 축복에 대한 야곱의 강한 집념으로 이해하고 29절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였다는 내용과 연결하여 야곱의 기도의 승리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복음과 상관없는 종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기도하라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물론 그것도 기도가 무엇인지 그 의미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기도의 씨름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은 아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무시한 말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씨름은 야곱이 하나님께 씨름할 것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셔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야곱의 씨름은 기도와는 무관하다. ‘기도의 씨름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자’는 말이 기도를 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일 뿐이기에 이방인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야곱의 씨름에서 생각해야 할 내용은 무엇일까? 지금 야곱은 에서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에 대한 에서의 감정을 풀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에서 에서에게 줄 예물을 택하고 그 예물을 종들에게 맡겨에서 에게로 보내는 것이었다. 에서의 화만 풀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곱의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야곱의 씨름에서 배워야 한다.
야곱은 예물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얍복 나루에 혼자 남았었다. 32:24-32다. 홀로 남은 것은 여전히 자신에 대한 에서의 마음을 알지 못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처럼 불안한 상태에서 누군가의 공격을 받는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항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야곱의 씨름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와 씨름을 하신 것은 누가 씨름을 잘하는지를 겨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야곱의 본능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인간이 어떤 욕망에 붙들려 살아가는지를 야곱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25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허벅지 관절을 치게 되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 날이 새려 하자 “나로 가게 하라"라고 하고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놔주지 않는다. 여전히 축복을 향한 강한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야곱이 “야곱이니이다”라고 답하자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야곱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이 내용들을 보면 도무지 앞뒤가 연결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용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야곱의 인간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책임지고 살고자 하는 욕구와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에서 도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축복을 받아내고자 하는 집착이다. 즉 축복에 집착하는 야곱을 만나게 되는 것이 본문이다.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어긋나게 하는 것은 야곱을 지탱하는 힘을 무너뜨린 것과 같다. 지금까지 야곱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은 축복이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얻고,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채고,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봉사한 모든 일들이 원하는 축복을 얻기 위해서였다. 야곱에게 축복은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였고 그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야곱이 기다리는 하나님은 자신의 축복을 이뤄주는 분이었다.
하지만 야곱에게 하나님은 야곱의 힘을 무너뜨린 분으로 찾아오셨다. 야곱이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생소한 하나님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신 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생소한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심으로 야곱은 사라지고 이스라엘로 존재하게 되었다. 야곱이 세상의 축복을 의지하며 그 힘으로 살고자 했던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이라면 이스라엘은 그 힘이 무너진 자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이 축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그가 참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 절게 된 존재이다. 자신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전 야곱처럼 자신이 원하는 복을 주기 위해 오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지탱하고 있는 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분으로 바라봐야 한다.
다리를 절게 된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고 증거이다. 내가 힘으로 삼던 모든 것이 무너진 그 흔적이 있어야 한다. 세상 것으로는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그것이 하나님을 만난 흔적이다. 하나님을 만났기에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주만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말씀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씨름에서 이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허벅지 관절을 친 것으로 씨름이 끝났고 야곱이 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자신을 향한 욕망과 집착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자 할 정도로 강하다는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보면 야곱은 심판의 대상이다. 죽어야 할 존재이다. 그런데도 생명이 보존 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며 은혜이다.
그것을 야곱은 30절에서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라고 말한다. 비로소 자신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뜬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야곱의 축복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 된 것으로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축복은 어디에서 실감하게 될까? 십자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안에서 우리는 생명이 보전된 자로 존재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인해 누리게 된 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에 눈을 뜨게 된 신자는 야곱과 같은 우리의 욕망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힘으로 여겼던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음을 고백하며 예수님만 높이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신자이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것이 야곱의 삶의 방식임을 알기 때문이다. 현대교회가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인들을 야곱의 삶의 방식으로 끌어간다.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고 기도로 승부하자는 말들이 그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말씀이 아니면 우리가 어떤 욕망으로 살아가는 가를 모른다. 그래서 야곱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를 치신다. 그것이 말씀이 있는 이유이다.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일이다. 야곱은 죽고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이스라엘로 새롭게 일으키시고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고백하는 신자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해 찾아오셨다. 찾아오신 흔적이 있는 그가 이스라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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