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는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이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치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지게 되고 물고기 뱃속에 삼키는 징계를 받게 된다. 후에 정신을 차려서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함으로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선교 명령을 거역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제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교재이다.
하지만 요나서는 선교 이야기도 아니고, 이방인의 구원 이야기도 아니고, 회개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요나서의 중심을 보지 못하면 요나와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만 보이겠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당시 이스라엘이 어떤 잘못된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는가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지 살펴보자.
먼저 2절을 보면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한 내용은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면 니느웨의 악독을 책망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요나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을까? 니느웨의 악독, 즉 그들의 죄를 외치라고 하신 것은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의 심판을 경고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이유는 없다. 요나에게 이방 나라인 니느웨는 멸망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이유는 왕하 14장을 배경으로 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왕하 14:25-27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 보면 선지자 요나가 등장한다. 요나는 아모스 선지자와 함께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활동을 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초대 왕인 여로보암이 죄에서 떠나지 않던 때였다. 이처럼 죄에서 떠나지 않은 이스라엘에 요나를 보내서 심판을 선포하고 멸망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것이라는 말씀을 외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죄가 가득하여 심판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에게 영토가 회복된다는 은총의 말씀을 외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는 형편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요나가 외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영토가 회복되고 나라가 강대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도울 자도 없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보신 자비와 긍휼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요나는 이스라엘이 죄에서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경험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하시는 것도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서 회복하기 위함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본다면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멸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고 구원을 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다. 자신이 니느웨로 감으로써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요나 자신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요나만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사고방식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이방인은 저주 아래 있는 자로 오직 멸망의 대상이었다.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복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긍휼과 자비 또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이방인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면 다시스로 도망치는 요나는 요나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역시 악이 가득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긍휼과 자비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악이 가득한 자에게는 심판과 저주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악이 가득한 자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같다. 그렇게 보면 요나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나타내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요나는 니느웨(현재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 IS 점령지)와 반대편에 있는 다시스(스페인)로 가기로 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탔다. 3절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라는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이 마치 하나님이 요나를 돕고 계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요나의 입장에서 일이 자기 생각대로 잘 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때 하나님은 풍랑으로 요나를 다스리셨다. 즉 욥바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것이 요나 생각에는 일이 잘 풀리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바다로 나가게 하셔서 물고기 뱃속에 삼키게 하기 위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재의 일이 잘되고 못 되는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에 마음 둬야 한다.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고, 배가 파선할 위기에 처하자 사공들은 자기의 신을 부르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물건들을 바다에 던져졌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풍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자 이 모든 것이 신이 노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누가 신을 노엽게 한 자인가를 제비를 뽑아서 결정하기로 했다. (7절)
그리고 요나가 제비에 뽑히게 되고 무리가 요나에게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8절)고 묻고,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9절)고 답한다.
요나의 답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도망을 치는 상황이다. 그것 때문에 풍랑을 만난 것도 요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히브리 사람으로서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것을 보면 요나는 자신이 다시스로 도망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로 그렇다. 우린 스스로를 성도로서 여호와를 섬기고 경외한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요나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유익을 따라 사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나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고 인정도 한다. 그런데도 상한 심령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결국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것을 쉽게 여기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끊임없이 개입하셔서 그 생각이 수정되게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 뜻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참되시다.
선원들은 풍랑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신을 부르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풍랑을 이길 수 없었다. 풍랑에는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 하나님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힘과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참으로 헛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말씀으로부터 도망치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럴 때 풍랑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1:11-17 바다에 던져진 요나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을 치는 요나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게 되고, 배에 함께 한 선원들로부터 자신이 풍랑의 원인자로 주목을 받게 된다. 이제 선원들은 풍랑을 해결하기 위해 요나에게 11절에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답한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을 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여 풍랑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의 진노도 자연히 해결되고 풍랑도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한계이다.
세상은 전통적으로 이런 믿음으로 신을 섬긴다. 죄로 인해 신이 진노하면 반드시 재앙이 오게 되고, 재앙은 신의 진노를 풀어주는 것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의 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신을 진노하게 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진 자신이 살아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은, 자신의 희생으로 선원들을 살리고자 하는 희생정신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요나는 이방인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이 싫어서 말씀을 피해 도망을 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나는 왜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을까? 요나는 풍랑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안 이상, 자신이 죽지 않고는 풍랑이 해결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겠습니다’라고 마음을 바꿀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니느웨로 가겠다고 하면 풍랑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에게서 끝까지 이방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완고함을 볼 수 있다. 자신이 바다에 던져져 죽는다고 해도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내려지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생각하는 완고함이 요나에게 있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완고함이었다.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하시고자 또 다른 일을 하신다.
곧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자 풍랑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잔잔해졌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들이 여호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했다.
우리에게는 믿음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아무리 해도 믿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으로 구분할 때가 있다. 이스라엘은 이런 선입견으로 이방인을 평가했다. 때문에 율법도 모르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 그들은 오직 멸망의 대상이었을 뿐이지,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했다. 이스라엘 밖에서, 율법도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선원들은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제물을 바치고 서원을 한다. 이것은 선원들이 구원을 받았는가가 중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라도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풍랑이 잔잔하게 된 것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런 기적적인 체험이 믿음의 힘이 된다면 그 누구도 이스라엘의 믿음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고,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에 있어야 마땅하다.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고 심판을 받았다. 풍랑이 잔잔하게 된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선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서원을 하게 되는 것이 풍랑이 잔잔하게 된 기적의 일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풍랑이 잔잔하게 된 일이 선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처럼 인간의 외적 조건이나 체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뜻하시고 하나님이 믿게 하고자 하신다면 누구라도 믿음에 거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요나는 믿을 사람과 믿으면 안 되는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이 판단을 한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성경에 등장하는 옛날 얘기로 치부하면 안 된다. 사람들은 대개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물고기에게 삼켜져서 그 뱃속에 삼일 동안 있었다는 얘기를 마치 우화처럼 생각을 하려고 한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내용이고 오늘날 경험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나의 기준을 가지고 이웃을 평가하고 판단하면서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며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선교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말하는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과 상관없이 인간의 고집을 가지고 이웃을 비방하고 판단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긍휼을 짓밟은 자로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요나서이다.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바다에 물고기를 준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미리 알 수 없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자신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통해서 요나의 생각을 고쳐 가셨다. 그렇게 해서 기어코 니느웨로 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 뜻을 포기하는 일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생각을 고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일이 잘되고 못 되는 것으로 크게 연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일이 잘되면 기뻐하고 안되면 낙심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은 성도를 그 마음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이 잘되고 못 되는 것에 연연한 사람으로 살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증거할 증거자의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일하시는 것이다.
선원들처럼 모든 노력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자로 만들어 가기도 하시고 세상을 두려워하는 우리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로 만들어 가기도 하신다. 또한 항상 내 중심의 생각에 머물러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각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요나는 자기 생각과 고집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완고함을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다. 말씀보다 자기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을 보여준다.
요나서를 통해서 내 생각과 고집에 머물러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생각과 고집에 의한 평가와 판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믿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긍휼과 자비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것을 알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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