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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강이 있는 성도 - 에베소서 1장 1-2절

차작가 2023. 11. 28. 12:30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항상 인사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본문은 편지의 형식상 인사말에 해당된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인사말이니까 깊은 뜻은 없을 거야’라고 지나친다면 크게 실수할 수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용어 하나하나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나타나는 사건들이고 의미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는 용어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증거하는 핵심적인 내용임을 생각해야 한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는 자기 고백과 함께 ‘성도’‘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역시 예수님과의 관계 밖에서는 나와질 수 없는 고백임을 생각해 보면 비록 인사말이라고 해도 우리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고, 예수님과의 관계로 인해 어떤 복을 누리는 상태에 있는가를 말해주는 내용들이다. 때문에 아주 익숙한 말이라고 해서 식상하다는 느낌으로 대할 수 없는 내용임을 먼저 주지해야 한다.

특히 2절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바울의 모든 서신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우리가 서로 만났을 때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하는 것처럼 형식적인 인사말로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형식적인 인사로 교회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말을 대개는 모든 일이 잘 되고 가정이 평안을 누리는 의미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도가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겨우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인사말의 모든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어디 서신서의 인사말뿐이겠나?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은혜와 평강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 모두가 은혜와 평강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자는 은혜와 평강, 이 용어를 결코 식상하다는 느낌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늘 새롭고 기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은혜와 평강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의 우리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은혜와 평강은 환경과는 무관하다. 만약 환경적인 내용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환경 안에서 은혜와 평강의 새로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매일 반복되는 환경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환경이 매일 변화되지 않은 이상 환경으로 인한 은혜와 평강의 새로움은 느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환경이 좋으면 매일 주어진 은혜와 평강에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았다 해도 결국에는 좋은 것의 좋음을 잊게 되어 있다. 때문에 사도가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삶의 환경과는 무관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사도는 은혜와 평강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은혜와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에게만 해당된다. 신실한 성도가 아닌 자와는 무관한 것이 은혜와 평강이다.

여러분은 자신이 은혜와 평강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물음에는 항상 답하기가 머뭇거려진다. 왜냐하면 자신의 현재 삶과 심적 상태가 은혜와 평강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역시 은혜와 평강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대개 자신이 은혜와 평강에 있다면 무엇보다 심적 상태가 근심과 염려가 없이 평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심과 염려로 가득한 마음 상태를 두고 ‘나는 은혜와 평강이 있다’라고 말할 사람은 흔치 않다. 은혜와 평강에 대한 자기 이해, 자기 기준이 있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은혜와 평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의 심적 상태를 다스려서 의도적으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게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내적 치유라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것은 심리학에 불과하다. 긍정적 사고방식, 마인드컨트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신앙으로 포장하여 활동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마치 기독교인 것처럼 여기지만 실상은 모두가 인간에게 초점을 둔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삶의 환경이 평안하고 그 마음 또한 염려와 근심이 없는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는 의미로 은혜와 평강을 말하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말의 의미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이 말은 은혜와 평강은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은혜와 평강은 세상의 것과는 무관하며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떤 결과가 일방적으로 내게 주어진 것을 뜻한다.

사도가 은혜를 말하면서 평강을 함께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외치신 말이 ‘회개하라’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이다.

요 20장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모인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자기들이 모인 곳의 문을 닫았다고 말한다. 그처럼 두려움에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선포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심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또 다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과 동일함을 의미한다.

아버지께 보냄 받은 예수님의 길은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낮아지며 고난과 죽으심이 있는 길이었다. 결국 제자들이 보냄 받은 길도 자기 영광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있는 길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원하지 않고 두려움이 있는 길로 보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지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다. 예수가 없이 자신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힘으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강을 선포하셨다. 이 평강의 의미는 제자들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부활의 주가 함께 하시는 길이라는 뜻이다.

신자는 하나님과 예수님께로부터 베풀어진 은혜 안에 있다. 이 은혜가 평강이다. 신자가 은혜의 세계 안에 있음을 자각한다면 두려움과 근심, 염려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자에게 가장 좋은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내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과 염려에 매이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일치시키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뜻은 항상 욕망을 기초로 하고 있다. 낮아지기보다 높아짐에 뜻을 둔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낮아짐에 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낮아짐에 뜻을 두게 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뤄지는 것이고 평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소원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라 할 수 있다.

세상에 평강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악한 영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악한 영에 붙들려 생명에서 떠난 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평강이 있을 수 없다.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평화롭다고 해도 평강의 상태는 아닌 것이다.

때문에 평강은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심판에서 건지신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한 자로 구별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 은혜가 평강에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의 신실한 성도 되었다는 것으로 신자는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세상에서의 행복과 풍요로 인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꿈꾸는 행복과 풍요를 모두 누린다고 해도 그 결국이 심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평강이라고 할 수 없다. 세상이 모두 심판으로 끝날 때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로 생명에 거하게 된다면 그것이 곧 평강이다.

은혜와 평강이 있는 신자는 자기를 위하여가 아닌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길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임을 안다. 그래서 낮아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도 순종하게 된다. 낮아짐으로 인해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은혜와 평강이 있는 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