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찬송하리로다’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말을 접할 수 있다. 시편은 거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찬송, 찬양은 어떤 대상의 업적과 행한 일을 높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고 베푸신 일을 높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베푸신 일에 대해 무관심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기독교적인 가사로 구성된 노래를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찬송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행하시고 베푸신 일을 증거하는 말씀이 있는 자리에 찬송은 당연하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찬송하리로다’는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누리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당연한 말이다.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한 사도는 찬송의 이유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찬송의 근거이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라면 모두가 신령한 복을 받았다. 문제는 우리가 신령한 복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신령한 복을 하늘에 속한 모든 복으로 말하고 있다.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세상의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뜻이고, 때문에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유가 많고 성공하는 것과는 다른 복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을 복으로 약속하신 적이 없으시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여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지만 그것은 단지 땅이라는 부동산을 주신 것이 아니다.
또한 장수와 후손의 번성을 복으로 말씀하신 것도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세상에서 장수하고 후손이 번창하는 복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곧 복에 거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시고 그 땅으로 인도하신 것은 장차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실 것임을 담고 있는 사건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땅에 대한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신 것 또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배우게 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과 같은 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 또한 세상이 누리는 동일한 것을 복으로 주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만약 자기 백성이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헛된 것을 구한다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하다.
신자는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골 1:1-3에서 증거 한 것처럼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고 생각해야 한다. 땅의 것은 그 질과 많고 적음을 떠나서 죽음에 속한 것이고 썩어질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자가 예수 안에서 살았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도 믿는다고 하고, 땅의 것은 썩어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도 동의하면서 땅의 것을 복으로 간주 한다면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신령한 복의 가치와 영광은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신령한 복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재물이 약속되어 있을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은 재물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린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정당화 할 수 없다.
그러한 이유는 이방인이면서도 재물의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 ‘모든’이라는 말은 복이 100가지가 있는데 100가지의 복을 다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의 복이 필요가 없는 부족함이 없는 복을 주셨다는 뜻이다. 그것이 신령한 복이다. 즉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함이 없는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만 보면 신자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복된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한데 문제가 신자라 자처하는 우리 자신들이 이 복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부족함이 없는 신령한 복이 사실적인 것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을 얻은 것,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 하늘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 중 어느 것 하나도 현실의 삶에 도움 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질적으로 더 나은 풍요로운 삶을 원한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만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것보다 재물에 더 기울어지는 것을 스스로 통제할 힘이 없다.
그러면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이 신령한 복이고, 세상 무엇보다 더 귀한 복이라는 것을 이론으로 머리에만 담은 채, 마음은 땅의 것에 매이고 늘 부족함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과 감사도 모두 이론적인 내용에 머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이 이러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자를 그렇게 살도록 버려두지 않는다. 에베소서 4:19절에 보면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 돼"라고 말한다. 신자는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비록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생명의 존귀함과 영광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생명 안에 있기에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있는 자로 존재한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은 감각 없는 자이기 때문이고, 감각이 없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 원수로 행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방탕한 채 살아가는 자신으로 인한 애통이 없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신자는 생명의 감각으로 인해 방탕에 방임되어 더러운 욕심으로 행하는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어 있다. 자신의 실상을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 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될 수 없는 자신을 아들 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고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보게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 되었다는 것을 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일컬을 수밖에 없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시고 그 복을 누리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신자는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 채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그 길로 계속 갈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냥 내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예수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예수 안에 붙들어 놓기 위해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간섭하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자는 하늘의 복을 말하면서도 늘 세상의 것에 메어 있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다는 것이 참으로 큰 축복이라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 그로 인해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의 찬송은 땅의 것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게 되면 시험과 시련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다. 어떤 형편에서도 신자는 신령한 복안에 있다는 것이 참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이 마음 깊이 다가오지 않는다면 기도해야 한다. 성령으로 인해서 자신이 신령의 복의 세계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가 있게 되는 것은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지 않고 더러운 욕망으로 행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감각이 살아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이 신령한 복을 받은 증거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았고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신다는 증거이다. 신령한 복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그처럼 감각이 살아있는 모습이 나타날 수 없다.
신자 되었고 신자로 산다는 것이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신령한 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복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면 땅의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만으로 감사하면서 은혜와 평강이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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