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은 존재이다. 풍성히 받았다는 것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풍성히 받은 신자는 이미 부족함이 없는 상태로 부름 받았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끼며 하나님이 그 부족함을 채워주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은 것으로 신자는 이미 부족함이 없는 은혜의 세계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증거 한 복음의 내용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풍성하신 은혜를 실감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보다 세상이 더 가치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죄 사함의 은혜의 풍성함은 현실과 상관없는 미래적인 일로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죄 사함의 풍성하신 은혜가 세상의 사소한 일에 가려지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은혜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죄의 무거움을 알아야 한다. 풍성하신 은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 사함인데, 죄의 무거움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은혜의 가치 또한 알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절)고 말한다. 아마 이 구절을 어렵다고 생각할 분은 없을 것이다. 실천적인 면에서도 역시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어떤 말씀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역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실천이 불가능하다. 이유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입술을 열어서 ‘주여’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전도로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와서 ‘주여 믿습니다’라고 하면 구원 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죄 사함의 은혜를 값 싼 것으로 오용할 소지가 많다. 이것도 풍성하신 은혜를 풍성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이미 요엘서에 예언되어 있는 내용이다. 욜 2:32절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라고 말한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누구든 ‘여호와’란 이름만 부르면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고 조상 대대로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살아온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여호와 이름을 불렀던 이스라엘은 남과 북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요엘 선지자는 남은 자 중에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자들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의 부름을 받지 않은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의 이름, 즉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불러주신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며 그 이름을 부르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의 가치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 복이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으로 얼마든지 죄 사함의 풍성하신 은혜를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놓치고 잃어버린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에만 가치를 두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빈약함, 빈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요할 수 있는 풍성함을 주셨지만 그것은 밀쳐 버리고 보이는 것만 바라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빈곤함에 머무는 이것이 불행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명 복된 자인데도 불구하고 신자 스스로 자신을 불쌍한 자리로 밀어 넣는 것이다.
신자는 이러한 불쌍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돈이 없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알지 못한 것이 불쌍한 것이다.
신자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내가 기도했다’‘내가 복음을 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은혜는 항상 나를 밀어 내고 그 자리에 주를 세우는 것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 하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삶의 중심에 주가 계시고 주로 인해서 주를 믿으며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 사함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셔서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에 붙들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이다.
신자가 이 은혜 안에 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진심으로 ‘나의 모든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나는 주의 은혜로 말하고 주의 은혜로 기도하고 주의 은혜로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에 있다. 은혜의 증거는 절대로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의 잘 됨이 은혜의 산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 사함의 은혜를 왜 풍성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까? 피의 공로, 은혜가 아니고서는 세상 무엇으로도 사함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베드로전서 1:18)라고 말한다.
은, 금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보화이지만 그것은 모두 없어질 것들일 뿐이고 대속함은 그처럼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것이 베드로의 증거이다.
우리는 거룩하시고 왕이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존재이다. 부름 받았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부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먼저 생각 하해야 한다. 우린 부름 받을 자격이 없는 악하고 더러운 존재이다. 그런 우리가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 들어와 있으매 마음을 둔다면 지금 내 앞에 놓인 상에 뭐가 있는가에는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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