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그 뜻의 비밀 - 에베소서 1장 9-10절

차작가 2023. 11. 29. 11:40

지금의 기독교를 보면 신앙이 개인화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신앙을 예수 믿고 천국 가기 위한 것, 그리고 나의 일을 이루고 복 받기 위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자기 문제를 중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자기 문제와 일이 자신이 의도하고 원하는 대로 풀리는 것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사랑, 은혜를 실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늘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완료된 상태이다. 부족하지도 않고 쟁취해야 할 것도 아니다. 이미 풍족하게 완료된 은혜이다. 그 은혜에 나를 맡기고 담담히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 은혜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죄 속량, 죄 사함이다.

9절을 보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오"라는 말씀이 있다. ‘그 뜻의 비밀’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은 감추어져 있는 비밀이라는 의미이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처럼 비밀인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은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왜 비밀이라고 하는 것일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비밀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으로 이미 세상에 공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밀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군사비밀처럼 어느 공간에 꼭꼭 감추어진 채 누구도 볼 수 없도록 통제된 상태에 있어야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비밀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말한 대로 성경을 통하여 공개가 되어 있다. 사도 바울 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을 전파한 예수님의 말씀이 존재했었다. 즉 복음이 이미 세상에 공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은 철저하게 비밀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담긴 계시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밀을 열어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지혜와 총명이다.

그런데 지혜와 총명은 배워서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은 하늘로부터 주어져야 했다.

바로 그 지혜와 총명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넘치게 하셨다. 이유는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그러면 비밀을 자기 백성에게 알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하셔서 그 은혜로 인한 감사와 찬송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고자 하신 것이 이유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넘치게 하신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게 된 신자는 자신의 앎으로 타인을 평가하거나 심판하지 않는다. 앎을 자기 우월감으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게 된 것을 자기 지식이나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알게 된 것임을 잊지 않기 때문에 앎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앎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뜻의 비밀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골 1:27절 뒷부분에 보면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이다.

현대 사회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독교가 들어가 있는 곳이라면 설사 예수를 믿지 않아도 예수님을 안다. 그런데도 예수를 비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로 존재한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책망하면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권면했다. 이 말대로 하자면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과연 그것을 인정했을까? 대대로 하나님을 섬겨온 민족이고 율법을 지키기 위한 열심 또한 대단했다. 그런데도 호세아는 이들의 앎을 앎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예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한 무지한 자로 여겼다.

세상이 예수에 대한 알고 있는 앎은 지혜와 총명으로 인한 앎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를 안다고 해도 자기 죄를 깨달으면서 예수의 피로 모든 죄를 속량하신 은혜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면 그의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의 은혜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풍성한 은혜의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되면서 자신이 얼마나 복된 세계로 이끌림 받았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은혜로 인한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된다. 이것이 비밀을 알리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신자 됨이기 때문에 17절에 보면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것이다. 계시의 영은 하나님께 직통계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는 영을 의미한다. 즉 성령을 말한다. 신자는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신자는 더 이상 계시의 영을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앎은 은혜의 풍성함을 보게 하고 은혜의 풍성함에서 현실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우리의 삶은 늘 세상에 붙들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는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게 되고 풍성한 은혜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신자 됨의 길로 이끌림 받기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게 된다.

우리에게서 이러한 기도가 나온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나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하려는 사람은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능력을 받아서 그 능력으로 타의 본이 되는 업적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이해하는 신앙의 범주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은 결국 자기 자랑으로 흘러갈 뿐, 그 열매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으로는 맺어지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비밀은 알려주지 않으시면 알 수 없다. 우리 스스로 비밀을 깨닫고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런데 비밀을 아는 앎은 우리의 지식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앎이 지식으로 저장되는 것이라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알게 하신 것으로 더 이상 하나님이 하실 일은 없게 된다. 비밀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해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에 대한 지식으로 넘친다고 해도 그 지식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신자로 살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 항상 가시적인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리시는 일을 계속 하시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이 알려주심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이 이끄심으로 진리의 길로 가게 된다. 한 순간도 내 힘으로 신앙의 길로 간 적이 없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감히 ‘내가 믿는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립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가 자기 영광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알려주심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세상의 지식과는 무관하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천재라고 해도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는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알리셨다는 것은, 사람은 지혜와 총명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나누어진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지혜와 총명을 받았다는 증거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에게만 비밀을 알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비밀을 아는가 모르는 가로 판명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든 하나님의 비밀을 안다면 그는 복 받은 사람이다. 비록 세상의 영광이나 칭찬과는 상관없는 앎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앎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고, 그 앎이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주어졌음을 생각하면 앎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자는 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악과를 먹고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두게 된 인간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달아 알 수 없고,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자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들 속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지혜와 총명이 있고,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하늘의 넘치는 복을 받은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신자 됨의 전부가 아니다.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받았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된 존재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자로 존재하는 것이 신자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복되다’고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런데도 복으로 인한 기쁨이 없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혜와 총명이 있어서 비밀을 알고 통일된 자로 존재되기를 원한다면 그는 이미 그 모두를 이룬 자로 존재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현재의 자신에 대해 실망 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뭔가 더 이루고 팽창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금의 자신으로 존재되기를 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자기 문제로 고민한다. 현실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것을 상상하면서 불안해한다. 그로 인해 신자가 어떤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가를 놓치면서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밀을 알리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면 자기 일의 성취에 뜻을 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이 내게 이뤄주기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참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다. ‘경륜’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세우신 뜻과 작정하신 모든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예정하신 것이고,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은 이 예정을 따라 흘러가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것이 신자이다.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면 반드시 그 예정하신 대로 이뤄지게 되어 있다.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고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에 내가 원하는 나의 인생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은 현재는 통일 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분리, 분단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깨어진 세상의 형편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세상은 악의 세력에 다스림을 받게 되었고 그것은 모든 만물이 오직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 생존을 위해 약자를 정복하고 삼키는 방식의 삶이 통일되지 못하고 깨어진 세상의 형편이다.

사 11:6-8절을 보면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고 말한다.

세상이 죄 아래 있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었다. 아담도 하와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여기는 한 몸의 관계, 즉 통일의 관계에 있었다. 이 관계가 죄로 인해 깨어져 각기 자기 몸에 대한 관심으로만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처럼 깨어진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그 모든 예정을 이루시는 경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륜을 위해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이 주셨고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다.

많은 사람이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한다. 구원 받은 신자가 살아가야 하고 이루어야 할 삶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성화되는 것으로 연결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과 구원 이후의 삶은 연관성이 없다.

구원까지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구원 이후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통일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염두에 두지 않은 생각이다.

굳이 구원 이후의 삶을 말하고자 한다면 통일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는 것이 구원 이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 이후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으며 신자는 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도구로 부름 받은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다시 하나님의 예정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정하신 것은 거룩하고 흠 없는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이다. 이 모든 것이 신령한 복이고 이 복 또한 하나님의 예정이다.

우리의 삶은 이 예정에 이끌려 갈 수 밖에 없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예정 안에 함께 한 신자의 관계에서는 신령한 복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할 수는 없다. 이것이 교회로 말미암아 증거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신자들이 함께 한 공동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깨어진 관계가 아니라 통일된 한 몸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관계에 있는 신자는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할 뿐이다. 이것이 교회가 통일의 관계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만을 증거하고 자 한다면 인간의 높고 낮음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통일의 세계에서 가치 있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 사함보다 존귀하고 복된 것은 없다.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은혜만을 붙들면 된다. 그것으로 교회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교회의 건물이나 교인 수와는 무관하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관계로 모이는 교회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심으로 비밀을 아는 자이다.

성경을 보게 되면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죄로 인해 사망에 갇힌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알게 되면 내가 드러낼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만 마음을 집중하게 된다. 이것이 통일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이 일로 인해서 우리는 늘 새로운 자로 주를 바라보게 된다. 때문에 누구든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이다.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는 우리에게 죄의 속량보다 더 큰 은혜는 없으며, 이 은혜 안에서 신자는 부족함이 없는 자로 살아갈 수 있다. 이 은혜의 풍성함을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