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는 주께서 주도하시는 세계를 뜻한다. 그래서 주 안에서의 신앙은 전적으로 주께서 주도하시는 세계를 살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주께서 주도하시는 세계를 산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야 할 것도, 이루어지는 것도 없는 세계를 의미한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바탕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신 주님을 높이고 증거 하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는 것에 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믿음은 그 어떤 열심과 실천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더 가치 있는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눈에는 행함이 없는 것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더 믿음답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믿음에 대한 착시이다.
주 예수 안에서 믿음은 동일하다. 인간이 무언가로 믿음을 포장한다면 하나님은 포장하고자 하는 그 의도를 책망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 안에서’라는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만 해도 믿음을 빙자해서 교인에게 짐을 지우는 것은 믿음과는 상관없는 것임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 예수 안’에는 주님의 일하심만 있을 뿐이지 우리가 일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일한 것이 없이 그리스도로 인해 천국 가는 것이 ‘주 예수 안’인 것이다. 그렇다 해서 주 예수 안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주 예수 안에서 신자는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로 흠이 없고 거룩한 자로 여겨주시는 사랑과 은혜에 모든 초점을 둬야 한다. 그리고 주 예수 안에 있게 하신 사랑과 은혜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 진심으로 주 예수 안의 세계를 사는 신자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주 예수 안의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신자는 서로 동일하게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으로 연합한 관계로 함께 하게 된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깨어진 관계를 하나 되게 하신 통일이다.
바울의 기도는 이 같은 주 예수 안에서의 세계로 향해 있다. 이러한 바울의 기도를 보면서 지금 우리의 기도 방향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이고 기도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17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바울의 기도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문제는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는 지식적인 차원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지속되어야 할 관계적인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알아가는 것은 바울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고 오직 지혜와 계시의 영이 오심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신앙은 신앙이 아닌 종교가 된다. 나를 위해 신을 찾게 되고 나의 일을 위해 신을 부르는 종교성만 남게 되는 것이다. 종교는 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다. 신이 관심이 아니라 자기 일이 관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만 가능하다면 인간이 알고 있는 신에 대한 지식에 의해 조립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을 감싸고 있는 욕망에 의해 조작된 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배격하면서 하나님이 알게 하신 그 하나님만을 신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지금 알고 있는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인해 알게 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살아 있느냐 살아있지 않느냐?’로 확인할 수 있다. 신자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자기 존재는 지워지게 됨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오심이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사람은 본래 자기를 위해 사는 자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이 성령으로 인해서 갈수록 자신은 희미해지고 지워지며 대신 하나님이 선명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성령은 우리의 요구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의 오심이다. 이것을 요 16:7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계속 세상에 계시면서 모든 일을 하시지 않고 굳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서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동일한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우리의 몸으로 오셔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통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님을 드러내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저주의 길로 가신 것이 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함으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인간에게는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믿음 없는 인간의 믿음을 위해 성령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해결하실 분은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 성령을 사도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한다.
그러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했다는 증거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기도를 근거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을 사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자기 노력의 대가로 본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도 신앙을 이러한 시각으로 이해한다. 열심히 한 것만큼 복을 받고 성령도 열심히 기도하고 원하면 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받게 되면 인간의 열심과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구원의 문제, 의의 문제, 용서의 문제 등등 하늘에 속한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늘에 속한 것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저 주신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알고 싶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오심으로 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성령이 없이도 은혜를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성령 없는 자가 말하는 은혜는 땅의 것과 연결되어 있다. 땅의 것이 주어지고 땅에서의 일이 잘 되는 것을 은혜로 간주한다.
하지만 성령으로 인해 알게 된 은혜는 하늘에 속한 것이고 하늘로부터 주어진 존귀한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한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신앙이 깊어진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에만 집중하게 되고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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