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교회란? - 에베소서 1장 20-23절

차작가 2023. 11. 29. 11:45

교회가 무엇일까? 본문의 말씀 그대로 답을 내리면 그의 몸, 즉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이유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을 때 ‘나를 위한 교회’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 대한 기독교인의 인식을 살펴보면 나, 교회, 그리스도로 각각 분리되어 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교회에서 나란 존재는 무의미하다. 나란 존재는 덮어지고 대신 그리스도만 선명하게 부각되고 증거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고 의미라고 할 수 있다.

22절을 보면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을 능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부활과 교회의 머리 되게 하신 것으로 증거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능력은 2:1절에서 증거 한 바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그리스도가 머리라고 할 때 교회는 이미 죽은 자도 살리시는 강력한 능력의 증거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또 다른 능력에 목말라 할 필요가 없다.

세상 그 어떤 능력도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릴 수가 없는데, 이미 세상에 없는 능력으로 산 자가 되었고 그 능력의 산물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 받기를 원한다면 죽은 자를 산자 되게 하신 부활의 능력을 능력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산 자로만 구성되어 있다. 죽은 자는 몸의 관계에 들어올 수 없다. 즉 교회 자체가 죽음과 상관없는 생명의 나라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산자들의 연합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에 뜻을 두어야 할까? 당연히 죽은 자들 가운데 있던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의 은혜 안에 있게 됨을 감사하고 그것을 최고의 복으로 기뻐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하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몸의 관계에 있는 지체는 높고 낮음을 따지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지 않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은혜 안에서만 존재 의미가 있을 뿐 내 이름, 개인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서도 자기 이름을 위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가치 없는 인간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때문에 나를 살린 능력에 마음을 두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신자는 세상의 무엇이 자신을 끌어당긴다고 해도 끌려가지 않는다. 더 강력한 부활의 능력이 붙들고 있고 놓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21절에 보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이름은 세상의 그 어떤 권세의 이름보다 뛰어나다. 교회는 그처럼 뛰어난 이름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에 비해 우리의 이름은 사망의 냄새로 가득하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께 소속되어 그의 이름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야 말로 무한한 복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 같은 내용들이 여러분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여러분이 교회로 모여서 누군가의 허물을 비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들의 모임이라고 했다. 살았다는 것은 모든 허물을 덮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허물과 죄를 덮으셨기에 산 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산자의 세계에서는 누군가의 허물을 가지고 그를 비판하고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의 은혜가 그의 허물을 덮고 있는데 은혜를 걷어버리고 허물을 보면서 비판하는 것은 자신이 산 자의 세계,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소속되어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십자가의 피로 살았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100% 살아난 사람이 있는 반면에 50%만 살아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살리신 능력과 은혜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산자의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동일하다.

그런데 지금의 교인들은 자신의 것을 첨가해서 좀 더 나은 신자가 되려고 애를 쓴다. 하나님을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그에 따라 보상에 차별을 두시는 분으로 제멋대로 꾸며내고 자신이 생각하는 신의 취향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이러한 종교의 길에는 생명이 없다.

23절을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뜻이다.

만물은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만으로 충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채워달라고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는 매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을 지으신 후에도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께 기쁨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이 있었을까?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께 기쁨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자신에게 마음을 뒀다. 이러한 인간을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런데 죽은 자를 십자가의 피의 은혜로 다시 살리셨다. 다시 살림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된 것이다.

새사람으로서 할 일이 무엇일까? 나를 산 자 되게 하신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품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쁨이다. 나를 살리신 은혜에 나의 노력과 정성을 첨가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는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배우고 그 질서를 따라 살기를 소원할 뿐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는 이 세계를 증거하는 교회로 세워져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