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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 에베소서 2장 1-5절

차작가 2023. 11. 29. 11:46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현재로부터의 단절과 소멸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히 죽음의 시기를 좀 더 연장시키는 것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 소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헛되다. 과학의 발달로 수명이 10년 20년 연장된다고 해도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육신의 소멸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이라는 비참에 처한 인간의 운명이다. 바울은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은 자로 간주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러한 죽음에는 관심이 없다. 육신으로 경험되지 않는 죽음이고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죽음의 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것을 생명에서 멀어진 죽음의 상태로 말했다.

사실 성경의 이런 내용들을 실질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으로 부딪히고 겪는 삶을 실질적인 문제를 더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도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죽음의 상태를 실감하지 못한다면 살리셨다는 것 또한 실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기독교 신앙의 참된 세계에 대해 눈이 열리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성경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믿음을 주셔서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시고 그 세계를 보고 알게 되는 것으로 인한 기쁨과 감사와 위로를 경험하게 하신다. 이것이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뜻이다.

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진노의 자녀였다. 2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불순종의 아들이었다. 이 때의 삶은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좇았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오히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부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진노의 자녀로, 불순종의 아들로 사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 할지라도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죽음과 생명의 상태가 우리의 현실에서 실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도 생명도 마치 나와 무관한 듯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살리셨다고 하지만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실감하고 확증할 수 있는 변화도 없으니 답답함은 더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답이 될 수 있을까? 소위 성령의 역사를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할까?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약점이다.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보고 경험된 것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말씀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임을 모르는 것이다.

해결책은 시각이 바뀌는 것이다.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과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새로운 세계를 감지하지 못하는 둔한 상태로 단지 교회 생활만 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불순종의 아들들인 우리를 살리셨다는 하나님의 일은 신비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이성과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지만 신비스러운 일이니까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기존 상식과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육체로 경험할 수도 없음을 알라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울의 말대로 인간이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선언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마귀를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욕심을 따라 몸과 마음이 원한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스스로 죽음 아래 있는 진노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왜 나쁜가?’라고 반문 할 수 있지만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각한다면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피조물의 본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면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면 ‘살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먼저 자신을 왜 불순종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는지를 알게 된다. 세상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을 죽음에 처한 자의 삶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에 마음을 두게 된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죽었던 나를 살리셨다’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복으로 고백하며 감사하게 된다. 이것이 바뀌게 된 새로운 시각이다.

죽었던 우리가 살았다고 해서 악한 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신자가 기독교 신앙에 머물지 못한다. 하나님이 살리셨다면 적어도 악한 본성은 성령에 지배를 받으며 죄를 극복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를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보이는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헛됨을 알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생명의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

4,5절을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고 말한다.

우리의 공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인해 생명 사건에 참여되었다. 이것이 산 자의 신분이다. 이처럼 자신의 달라진 신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고 감사하는 것이 산 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이 내용들이 이해된다면 하나님이 불순종의 아들인 여러분을 순종의 아들로 부르신 결과이다.

불순종의 아들과 순종의 아들의 다른 점은 그 마음에 중심이 무엇인가로 드러난다. 불순종의 아들의 중심에는 두말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이다. 오직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전부이다. 하지만 순종의 아들의 중심에는 죽었던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살리신 신자는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다. 세상의 것으로 평가받기를 거부하게 된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죽었던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온 마음과 관심을 두기를 힘쓰는 것이 신자이다.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말씀만으로도 진노의 자녀인 우리에게 은혜가 얼마나 참되고 복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불순종의 자녀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과 다른 산자의 삶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