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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 밖의 이방인인 우리 - 에베소서 2장 10-13절

차작가 2023. 11. 29. 11:50

성경은 인간은 ‘죽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2:1절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내용은 죽은 자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었다’는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의 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성경은 나와 무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 ‘죽었다’는 인간의 상태가 바로 나의 상태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2절부터의 내용이 나 같은 자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다가오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일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것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크신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이다. 따라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의 예전의 상태이고 현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렸다는 복의 세계에 참여된 것이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거룩하고 의로운 자가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부활의 예수 안에서 저주가 아닌 생명으로 확정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베풀어졌다.

죽은 자인 우리가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이것을 10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로 말한다. 즉 죽은 우리를 살리신 이유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선한 일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죽는 것이 당연한 우리가 오늘 존재하고 있는 이유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것도 은혜를 아는 새로운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신 이유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선한 일은 우리에게 이미 예비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행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시로 옛 사람의 본성과 완악함을 드러낸다. 그 점에서는 에베소 교회도 다르지 않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유대인 신자가 이방인 신자 사이의 갈등이었다.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가 혼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갈등의 중심에는 율법의 문제가 있었는데, 유대인 신자들은 믿음과 함께 율법에 대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방인 신자들은 율법 없이 자신들의 믿음만으로도 구원을 얻는데 충분하다고 반박했다.

바울의 눈에는 이들의 갈등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훼방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신 사랑과 은혜의 일을 강조함으로써 신자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인가를 확인시키고자 했다.

인간의 실상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증거 한 바울은 “그러므로 생각하라"라고 말했다. 지금까지의 바울이 말한 내용을 근거로 너희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증거하는 모든 내용들이 에베소 교회 너희들의 이야기임을 알라는 뜻이다.

복음은 듣고 이해하고 알게 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하신 것처럼 복음을 알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따라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에베소 교회는 다시금 복음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이방인인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는 말로 에베소 교회가 도무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였음을 말했다.

그들은 육체적 조건으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었고 할레도 받지 않은 무리들이었다. 즉 육체적 조건에서는 구원 받을 만한 조건이 없는 것이다. 혈통적으로도 구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도 아니었고 약속의 언약도 받지 못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도 없었다. 외적인 조건으로 따진다면 유대인 신자보다 더 구원에서 멀리 있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유대인보다 더 못한 것이 이방인 너희들이니까 유대인 앞에서 머리를 숙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철저하게 멀리 있었기에 구원의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다가오는 것이고 ‘율법 없이 우리의 믿음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이 은혜를 멸시하는 교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은 언약을 받은 민족이고 이방인은 아예 언약 밖에 있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조건에 있어서는 유대인이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언약을 받았으면서도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언약을 받았다는 것이 구원에 있어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실패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언약을 받은 유대인들이고, 율법을 받았고, 하나님이 있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구원에 실패했다면 언약 밖에 있고 하나님도 알지 못한 이방인이 구원 받을 가능성은 더욱 더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이방인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된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라는 것이 본문의 의미이다.

복음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남을 뿐 인간의 공로나 행함은 있을 수가 없다. 모두가 허탄하고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 때문에 복음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할 뿐이다. 이것이 교회인 것이고 이 교회에서는 어떤 구별이나 차별은 나타날 수 없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택한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은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삼으셔서 구원하시고 세상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은 그들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을 성공한 민족이 되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 주셨다. 언약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선지자를 보내시고,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이스라엘의 구원에 도움 되지 못했다. 지금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험하고 싶어 안달이 난 기적의 사건 또한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언약 밖의 이방인은 바로 우리들이다. 언약 밖의 우리가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인생의 남은 마지막 때까지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고 은혜를 바라봐야 한다.

 

신자는 예수 피로 인해 가까워졌고 하나 관계에 있다. 세상의 어떤 조건도 관계를 허물 수가 없다. 말씀이 믿어지는 것이 기적이다. 신자는 기적 안에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내어 놓을 것은 우리를 살리시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지금 여러분의 현실로 자리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