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화평하는 교회 - 에베소서 2장 14-18절

차작가 2023. 11. 29. 11:51

화평을 국어사전에서는 “개인 간이나 나라 사이에 충돌이나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풀이한다.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화평이다. 그리고 인간은 모든 곳에 이러한 화평이 있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이 같은 화평의 상태가 자신을 편안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의미의 화평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을 근거로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화평을 세상이 이해하는 것처럼 다툼과 충돌이 없는 평화의 상태로 해석한다. 그리고 예수가 이러한 화평을 위해 오셨다고 생각하고 화평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의 할 일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화평을 이루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런 이해로 인해서 성경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진리의 말씀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의 수준으로 전락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화평이시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가 둘로 하나를 만드셨는데, 둘로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둘을 원수 되게 한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셨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이 일이 둘로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화평은 다툼과 충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둘이 하나 되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둘로 하나를 만든 화평의 관계에도 다툼과 충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충돌과 다툼이 없는 화평이지만, 바울은 관계적 충돌과 다툼이 없는 화평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지 싸움과 다툼이 없는 평화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막힌 담이 없는 것을 화평으로 말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존재했던 문제 중의 하나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갈등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전통적인 관계는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 것이다. 유대인의 어떤 문서에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드신 이유를 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멸망의 대상이었다.

 

반면 이방인이 볼 때 유대인의 그러한 태도는 독선이며 배타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유대인의 이런 태도 때문에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일어나기도 했고 히틀러가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것도 반유대주의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이런 전통적인 관계가 교회 내에서도 심각한 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되었고 그 중심에는 율법이 있었다. 유대인 신자가 이방인 신자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했고, 이방인 신자들은 그들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교회 밖의 갈등이 교회 내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들의 갈등은 사도행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행 15:1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한다. 이 문제로 인해서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게 되고 결국 바울과 바나나, 그리고 그들 몇 사람을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도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이일을 말할 때 바리새파 중의 어떤 믿는 사람이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소리친다. 이러한 소동 속에서 사도들이 내린 결론이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것이었다. 절충안을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를 봐도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의 화평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문제 해결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는 것에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되었는지 그 내막을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답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중간에 막힌담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될 수 없도록 막고 있는 율법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율법을 원수 된 것으로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원수 된 관계로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원수의 관계로 만들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 율법의 시각으로 이방인을 보게 되면 그들은 전멸당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반대로 유대인이 율법대로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유대인 역시 율법에 의해 이방인과 동일하게 진멸당할 대상이 된다. 유대인은 율법의 의미에서 이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간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 멸망을 받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유대인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자신들조차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율법에 의해서 멸망을 받을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로 모이면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는 둘이 하나가 된 것이다.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기 때문에 더 이상 담이 없는 하나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이며, 새로운 관계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보자. 이 관계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중간에 막힌 담이 없는 하나라는 새로운 관계로부름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율법에 의해서 멸망 받을 자로 정죄 받게 된다. 그리고 누구도 율법을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자가 율법 앞에서는 멸망의 대상자일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없는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완전한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고 십자가야말로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성취 완성이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 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하게 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 이방인의 구별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을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고 계명의 율법을 폐하신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다.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은 율법을 폐기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의가 되는 세계를 폐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율법은 있으되 율법으로 누군가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죄를 보는 것이다.

 

갈 3:28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한다. 바울의 이 말처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새로운 관계로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그릇된 가치관에 따라 세워진 모든 담이 허물어진 관계로 모여야 한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는 인간의 어떤 실천도 의로 평가될 수 없다. 인간의 실천의 여부를 기준으로 신앙의 정도를 나누고 구분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허무시고 막힌 담을 다시 세우는 결과가 된다. 즉 십자가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돌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만이 화평하게 할 수 있다. 어떻게 화평하게 할까? 그리스도의 의로우심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러분이 의로 여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멸망 받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함께하는 것이 화평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이 비밀을 깨닫게 하셨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우심에만 마음을 두 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