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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는 교회 - 에베소서 3:1-4

차작가 2023. 11. 29. 11:56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작정이 무엇이고 그 영원한 경륜과 작정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 그리고 신자에게 베푸신 무한한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가에 대해 증거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순히 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어떤 역사 배경 속에 존재하는가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백성이 아닌 자를 백성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없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이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 진노의 자녀였다는 말로 유대인이 생각하는 배경을 무너뜨렸다. 아브라함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는 것은 없는 것이다.

 

2절에서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라고 말한다. ‘경륜’은 일반적인 의미로는 천하를 통치하는 일이라는 뜻이고, 신학적인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과 계획을 이루심에 있어서 인간을 위한 일이다. 따라서 ‘은혜의 경륜’은 이 땅에서 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개입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의 역사는 성경 전체에 살아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생 여정에 개입되어 있고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리며 그 뜻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인도해가심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은혜의 경륜을 실감하지 못하고 쉽게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하는 매일의 현실은 욕망에는 한없이 부족했고 때때로는 불만과 원망을 토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은혜로 역사하시는 삶의 여정이라는 것이 대개의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처럼 핑크빛으로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세상과는 다른 환경의 삶으로 특별히 인도하지 않는다. 비진리에 있는 세상과 동일하게 고난과 어려움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역사되는 은혜의 경륜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현재의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힘일까? 신자에게 어울리는 답을 말한다면 ‘하나님’이라고 해야 맞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속마음도 그 답과 일치할까? 어쩌면 우리의 속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 간섭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이것을 안다면 나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의 미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의 미래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속해 있는데 걱정할 이유가 있을까? 여기에서 싸움이 시작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신이 원하고 계획한 미래가 있다. 나의 미래가 무너뜨려지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미래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 속에서 신자는 자신의 악함을 은혜가 덮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안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있다. 은혜와 사랑에 눈이 열린 자로 만난다. 이러한 만남에서 맺어질 것은 당연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가 없다. 나 같은 자의 모든 죄를 덮으신 은혜에 굴복한 자로 만나기 때문이다. 이 만남, 이 교제가 생생히 살아있고 나타나는 그 현장이 교회이다.

 

그런데도 현대교회에서 높고 낮음의 구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은혜를 말하나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은혜와 그들이 말하는 은혜가 일치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은혜는 자기 유익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에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주어진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은혜의 분량 또한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부름받았다. 피조물일 뿐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부름받은 것 자체가 은혜이다. 이 은혜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주어진 것으로 구분되고 해석될 수없다. 성경은 그러한 구분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신자가 은혜에 눈을 뜨게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될 수 없는 악한 자기 실상을 보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의 목적이 우리의 구원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미처 눈 뜨지 못한 은혜에 대해 눈을 뜨게 하고, 은혜에 눈뜬 자로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게 하심으로 은혜와 사랑에 대한 자랑과 높임만 있게 하심으로 영광 받고자 하시는 것이 은혜의 경륜의 방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은혜의 경륜의 중심에는 용서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가고 거룩하고 흠이 없고 아픔이 없고 죽음이 없는 처소로 완성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용서 때문이다. 즉 용서를 배경으로 하고 존재하는 것이 신자이다.

 

만약 용서가 빠진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율법의 행함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알았던 신앙의 세계였고 하나님의 요구였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가 하나님의 용서를 땅에 묻어 버린 채 유대인들의 율법의 세계로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은혜로 인한 용서의 기쁨보다는 자기 행함으로 의를 지탱하려는 종교의 세계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용서를 아는 사람은 은혜와 사랑을 말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보고 싶고 알고 싶다면 여러분 자신을 보면 된다. 시들어가는 몸이고 속은 더러운 냄새로 가득할 뿐이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셨다. 쓸모없는 자를 부르셔서 쓰시겠다고 하셨다.

 

만약 그 경륜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사망의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알게 되면 그 은혜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안에 있다. 그런데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할까?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 내려가 있는 존재인가를 더 확실하게 생생히 확인하라는 의미이다. 그래야 나를 그 자리에서 구출하신 은혜가 은혜로 다가오지 않을까? 이 은혜를 알고 서로 사랑 해야 한다.

 

신자의 관계에 세워져 있어야 할 잣대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복음은 어느 인간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갈 것이다.

 

은혜의 경륜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는 없다. ‘어떻게 되었습니까?’만 있다. 썩은 냄새 밖에 없는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마음을 두는 것이 신자이다. 모든 신자는 은혜의 경륜 안에 있기에 정죄할 것이 없다. 이것이 서로를 바라보는 잣대로 세워져 있어야 한다. 이 잣대로 인해서 차별이 정죄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만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