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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모퉁잇돌 되신 교회 - 에베소서 2:19-22

차작가 2023. 11. 29. 11:53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삼기 위해서였다. 이 말은 사람은 자신을 위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아갈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 자기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했다.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자신의 터전을 확실하고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되어가는 것에 마음을 두며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이러한 신자는 자기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하지 않는다. 하나님 이거 하실 처소로 지어가고 계신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인생이 되지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처소로 완성될 것은 확실하다는 믿음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자유하게 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지어가는 인생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으로는 인생을 평가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복음으로 모이는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에는 그 어떤 차별도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

 

20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교회는 세상이 아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 이것은 교회가 품고 있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교회는 무엇일까?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주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것을 교회이다. 교회와 외형적인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래서 외형의 크고 작음은 교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다. 교회와 교회 아님은 오로지 교회가 품고 있어야 할 내용의 여부에 달려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라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일관적으로 증거했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의 터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말씀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교회를 구분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 신자도 이방인 신자도 그터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다. 율법이 터가 될 수도 없고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이 터가 될 수도 없다.

 

현대 교회에서도 터는 넒은 땅이나 커다란 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이 터이고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되시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로만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되어 있고 부활하심으로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세상의 것은 간섭할 수도 끼어들 수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해야 할 교회의 일체성이다.

 

바울의 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개인과 개인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로서 무엇으로도 이 관계는 분리될 수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민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소유의 많고 적음이 다르다 해도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에는 그 어떤 영향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이다.

 

교회의 가치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것에 있다. 예배당의 크기나 교인의 수가 교회의 가치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다. 시골 산속에 서너 명이 모이는 교회와 대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모이고 수천억짜리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교회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교회는 외형적인 기준에 매여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교회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구원 받은 무리들의 모임이며 주 안에서 연결되어 성령으로 한 몸 되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것으로 말한다.

 

그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를 말할 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사도나 선지자들의 행위가 터가 아니고, 재물도 터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 뿐이다. 이것을 생각하며 교회에서 나와서는 안될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답은 분명하다. 예수의 보혈의 공로로 이루어진 하나 된 관계에 있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나 외적인 조건들이 기준으로 세워질 수 없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와 은혜가 교회의 물리적 크기에 따라 다르게 부여되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이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예수님에게 교회의 외적 크기는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가지 못하는 것은 이미 생각의 방향이 자신이 원하는 교회상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되어있어야 한다. 사도와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였다. 그 진리로 인해 매 맞고 죽는 길로 가게 된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진리였다. 그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 진리이다.

 

교회는 비진리로 하나 되어 있고 이 진리로 부족함이 없는 충만이다. 이것이 교회 됨이라는 것을 안다면 보이는 다른 것에 눈 돌릴 이유가 없다. 또 그것들을 갖춤으로 좀 더 교회답게 드러나고자 하는 헛된 생각에서 머물지 않을 것이다.

 

현대 교회는 교회라는 이름의 성 쌓기에 매진하고 있다. 모든 관심이 거대한 성을 쌓고 그 성 안에 안주하고자 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터로 하지 않고 교회를 자신의 터로 삼으려고 한다. 이러한 성 쌓기가 멈춰지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로부터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독교는 은혜와 진리의 종교이다. 이 세상을 향한 인간의 기대나 소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 기독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기독교는 신앙과는 무관한 길로 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과 정성이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과 은혜로 부어주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의 성취로 그리스도가 오셨다. 때문에 교회는 인간의 노력과 정성으로 성취되는 것을 믿음으로 말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없는 세상의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본주의에 의한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본주의에 의한 해석은 성경에서 인간이 실천해야 할 것들을 강조할 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증거를 통해서 나의 존재를 부정하며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다’는 고백의 자리로 끌려가게 된다.

 

이러한 은혜가 현실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가치하고 무력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죽었다는 본질을 놓고 본다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역사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존귀한 것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것을 증언하는 것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 받는 교회의 역할이다.

 

교회로 모이면서 예수님을 배우길 갈망해야 한다. 말씀이 여러분을 예수님을 아는 자리로 이끌어 가기를 원해야 한다. 예수님을 알고 그 은혜에 깊이 붙들리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기준을 벗어나서 진리로 자유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에 중요한 것은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배워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