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선택과 예정 - 에베소서 1장 5-6절

차작가 2023. 11. 28. 12:35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구원은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내용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법칙이다.

그럼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법칙이라면 하나님은 왜 성경을 주셨을까? 많은 사람은 성경에서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자만 구원을 받는다면 성경에 구원을 얻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하나 분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사도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한다. 사도가 말한 신령한 복은 우리를 택하여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신령한 복이든 세상 복이든 성경에 복을 얻기 위한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신자의 복 또한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경을 왜 주셨으며 신자가 성경을 읽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일까?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대상은 하나님이 택한 신자이다. 신자와 신자가 아닌 자는 성경을 보면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신자가 아닌 자는 자기 구원과 복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보게 된다. 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에 관심을 둔다.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부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완성된 구원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마음을 두며 구원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은 택한 자기 백성을 이 일에 초청하기 위하여 성경을 주시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고 이유며 목적임을 분명히 한다면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임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즉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읽는 것이 많은 기독교인이 범하는 중대한 오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다. 선택은 창세 전에 되어진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도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결국 인간 창조와 사탄의 등장 선악과를 먹은 범죄,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된 일이라는 의미가 된다(5,6절).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또한 인간 구원에 초점을 두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선택과 예정 안에 우리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 선택과 예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 선택과 예정이라면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이유가 모호해지고 우리의 존재 이유 또한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을 목적으로 선택하고 예정하셨으면 지금 당장 영원한 구원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원을 목적으로 한 선택이고 예정이라면 우리의 구원은 요즘 말로 철밥통이다. 어떻게 산다고 해도 구원에서 탈락되지 않는다. 결국 힘써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정을 우리 인생에서 벌어질 모든 사건과 일들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창세 전에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물론 인생의 어느 순간도 하나님과 무관하게 진행된 적은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일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의미의 예정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이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택하신 아들들로 하여금 어떤 삶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내버려 두셨을까?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으면서도 인간이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왜 그냥 방치하셨을까?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예정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뜻에 의해 범죄 한 것이 된다. 즉 범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허용하셨을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범죄와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흙에 지나지 않은 존재일 뿐임을 알게 하시고, 그러한 인간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아들이 되게 하신 그 은혜를 바라봄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는 것을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안에 있는 신자는 자신의 구원에 일조하는 자로 나설 수 없다. 자신의 구원에 조금이라도 일조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것은 이미 찬송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나에 대해 관심을 둔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안에 나라는 존재는 없다. 5절을 보면 사도는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한다. 사도가 말한 ‘우리’의 의미가 무엇일까? 바울을 포함한 에베소 교회의 신자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사도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모든 자를 가리켜서 우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곧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는 하나님이 선택한 신자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곧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자신의 구원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또 다른 반증이기도 하다.

자기 구원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죽은 자이고 흙에 불과할 뿐이며 먼지와도 같은 자기 존재를 잊고 있기에 ‘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는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 그래서 선택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시고 찬송이 나오게 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로마서 5:20)는 말을 한다. 설마 이 말을 은혜를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는 죄를 더 많이 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분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그 죄 또한 적지 않음을 안다면 마치 지금은 죄가 작은 것처럼 ‘은혜를 알기 위해 죄를 더 많이 지어도 됩니까?’라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붙들려 있는 우리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심으로 그 은혜로 인한 감사와 찬송이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이 드러나야 한다. 이런 의미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가 더한 곳’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속에 감추어지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죄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말씀의 세계이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도무지 빠져 나올 수 없는 죄의 세력에 붙들린 자임을 실감해야 하는 것이 ‘죄가 더한 곳’이라는 말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죄가 더한 곳’은 말씀이 있는 자리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 택함 받은 우리는 모두 동일하게 자신의 죄의 깊이를 보게 된 자들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즉 교회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를 날마다 말씀 안에서 보게 되며 실감하고 그런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감사하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 일에 우리를 불러들이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무너져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택한 백성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