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임한 사건, 즉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대할 때 성령이 오신 형태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성령 받은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1-3절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라고 말한다.
성령이 오실 때 일어난 현상은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온 집에 가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다고 하고,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현재에도 성령 강림에 대해 그러한 현상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 사실 현대 교회에서 성령 강림의 표적으로 바람 소리 같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특히 방언을 중요시하는 것도 볼 수가 있다.
물론 소위 보수교단이라고 하는 교회들에게서는 성령에 대한 신비적인 모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평가되는 것은 성령강림에 대한 신비적인 현상을 기대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뜨겁다'라는 표현을 하지만 신비적인 것에 대해서는 가급적 배제하려고 하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냉랭하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성령이 오실 때 발생하는 현상이나 형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 본문에서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현재에 있어서도 그와 동일한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동일하게 경험해야 할 표준으로 말할 수는 없다. 본문의 성령 강림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너희도 장차 이런 경험이 있어야 그것이 진짜 성령 받은 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뒤에 왜 성령이 오셔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이렇게 보면 성령의 오심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신 이유는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증인이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던 말씀이나 그 삶들이 진리였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증거하는 것일까? 믿지 않는 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함으로 가능한 것일까? 사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 따라서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삶이 말과 다르면 말에 대해서 불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말을 잘하는 사람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진리이며, 예수님이 곧 생명이며 길임을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삶의 유일한 원칙과 기준으로 삼고 그 원칙대로 기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능력으로 오시는 것이다.
과연 누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사셨던 그 길을 생명으로 알고 따라 가느냐로 그리스도의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그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심으로 결국 누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냐가 증명된 것이다. 만약 예수님의 말씀이 틀렸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이 옳았다면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옳았기에 하나님이 그분을 그냥 죽음에 놓아두시지 않으시고 죽인 자들 앞에서 살리심으로서 예수님의 모든 것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증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세상의 옳고 그름은 인간의 윤리나 도덕이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이 기준 되어야 한다. 즉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삶의 길을 따라가는 것만이 선한 것이고 의로운 것이며,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악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인간이 죄인임을 선언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행위로 맞섰다. 그러나 그것이 선이 아니며,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었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증거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부활은 단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기보다는, 세상에 대해서 선과 악을 분명히 규정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성령이 불의 혀같이 오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이 보였다고 했는데, 불의 혀란 심판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고, 갈라진 것이라는 것은 구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 본다면, 결국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할 자를 심판하고 구원할 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볼 수도 있다.
방언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현대 교회가 말하는 방언과는 다르다. 7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성령이 오심으로 성령을 따라 말할 때 각 지방에서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성령이 오셔서 방언으로 말하게 한 이유이다.
방언은 각 나라의 사투리를 의미한다. 세상은 맨 처음 말이 나뉘지 않았었다. 그런 것이 바벨탑을 쌓음으로써 말이 나뉘게 되었다. 결국 말이 나뉘어서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을 모아서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에게 도전한 증거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제자가 말을 할 때 그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말이 하나 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곧 성령이 오심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를 하나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실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새술에 취하였다'라며 조롱을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임한 자의 말에 의해서 말을 듣는 자와 듣지 못한 자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방언을 우리 멋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성령은 오셔서 하시는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신비한 능력을 주셔서 우리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무엇이 심판받을 모습인가를 증거하시기 위한 것이다. 결국 성도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된다.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것은, 기독교란 종교를 기준으로 한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서로 이해된다는 것을 말한다. 성령이 임한 자의 말은 성령이 임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같은 나라의 말을 한다 할지라도 듣긴 듣되 이해되지 않는 말이라면 결국 그에게는 방언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도 오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이 성령이 오신 증거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서로 이해된다면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교회가 진리라고 말하고 생명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증거물이라 말할 수 있다. 세상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가신 하늘을 소망하고 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성도에게서만 볼 수 있다. 천국을 소망하고 그 소망으로 살아가기를 힘쓴다면 곧 성령이 임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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