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해석: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셨고 세상에서 어떻게 죽으셨는가에 대해 증거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내려오셨다. 그것 때문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랐다. 사실 유대인들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부정하고 더러운 존재로 여겼던 이방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내려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어떤 구별도 없이 복음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것이 하나 된 교회, 교회의 통일성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랐다. 이것은 곧 복음을 들은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부어졌음을 알았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현상이 있었기에 성령이 부어진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성령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신 것처럼 비둘기같이,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그런 신기한 현상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성령이 부어짐을 알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당시 고넬료의 집안에 지금의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일까?
1.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로 자기가 경험한 것과 같은 것이었음을 증거 한다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0장 46절을 보면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이러라"라고 말한다. 당시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부어졌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어떤 말을 하게 되었느냐가 성령이 부어진 증거로 보였다.
2: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방언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복음을 말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복음을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는 복음을 하나님을 높임을 들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전하게 되어 있다.
2. 그래서 그는 예수 믿을 때 주신 선물이 같았다고 말한다. 성령이 선물이라고 말한다.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일을 막지 못한다고 말한다.
3. 이런 같은 선물인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성령 받은 것을 다른 말로 ‘생명 얻는 회개’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다.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opportunity to repent and live,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를 주셨도다 하니라
1) 생명 얻는 이란 죄 사함 곧 구원이다.
그럼, 생명 얻는 회개란 바로 구원 얻는 회개라는 뜻이다. 구원의 전제가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이고 이런 회개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말이 심오한 교리를 말하고 있다.
2) 베드로의 말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
3)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죄로 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죄에 후회하고 죄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그 예가 두 아들의 비유이다. 회개에는 2가지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먼저 후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4) 그럼, 무엇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
a. 행 5: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죄 사함을 주시는 것처럼 회개도 주신다.
b. 행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c. 딤후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잘못된 길로 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말하면서 그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화개가 어디서 오는 것인데 알 수 있다.
그래서 회개는 사람들 편에서 행동을 취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 그런데 잘못된 회개도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회개가 아닌 회개가 있을 수 있다.
아합의 경우.
왕상 21: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21: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성령께서 시키시는 회개가 아니었으므로 죄악에서 완전히 돌이키지는 못했다.
6) 회개는 반드시 말씀 전파를 통해서 일어난다.
a. 요나의 외침으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는 것
b.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회개의 표시인데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듣고 한 것이다. 회개는 진리가 전해 짐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오늘 본문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진리(하나님과 인간을 화평케 하신 분, 부활, 심판자)를 선포 할 때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복음 전파는 반드시 회개를 일으킨다.
결론: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이 세상보다 하늘에 더 소망을 두고 살고자 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열매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자신에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함께 하신다. 그렇다면 누구라 할지라도, 그가 설령 수 십 년 동안 미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 예수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높인다면 성령이 함께 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조차 의심하려는 습성이 있다. 내게 있는 미움의 감정이 '저 사람이 예수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 어떤 사람도 회개케 할 수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했다. 생명 얻는 회개는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들이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이방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였다.
17절에 보면 베드로는 '내가 누구 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결코 막을 수가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일에 복종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감정으로 만나고 교통하는 곳이 아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생명의 회개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럼 생명의 회개를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기도 안한 것, 교회에 빠진 것, 십일조 안한 것,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러한 것은 생명의 회개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러한 회개를 하도록 하지 않는다.
생명의 회개란 나를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회개이다. 생명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회개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쓸모 없음을 아는 회개이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회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회개를 하는 신자라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으로 누군가를 구분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악이 된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연히 성령에 의해서 자신의 감정과 미움은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거짓된 회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거짓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생명의 회개는 분명 그 열매를 드러낼 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거짓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열매를 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다짐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던 그 사람에게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그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형제이다. 하나님이 형제 되게 한 사람을 우리가 구별하고 밀쳐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복종하고 다 같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서 만나야 한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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