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베드로가 전한 복음 - 사도행전 10장 24-48절

차작가 2023. 12. 13. 12:57

본문 해석:

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 하사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reconcile) 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1: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원수 된 관계이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이 관계를 완화할 수가 없다. 인간끼리 원수 된 관계는 어느 한쪽의 노력으로 그 관계가 완화될 수가 있다. 그래서 원수가 친구로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변화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가 되게 한 죄를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가 예수님의 피로 인해 화목의 관계로 뒤바뀌었다.

21,22절을 보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 앞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을 받은 것을 뜻한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로 인해서 생명을 잃어버린 채 영원한 저주에 갇히게 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고 복된 사건이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 받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이미 이루어진 복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세움 받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악함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된 일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의를 믿는 것이다. 때문에 신자가 열심히 노력해서 더 좋은 믿음이 될 것을 요구받는 것은 예수 안에서는 없다. 단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사하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기뻐할 뿐이다.

21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전제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불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고 하나님과의 단절은 곧 생명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불화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불화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적 문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면 참된 평화에서도 멀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의 부자라고 해도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없다. 그 모든 이유가 하나님과의 불화에 있기 때문에 참된 평화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화목은 신앙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십자가의 피로되었는데 그러면 십자가의 피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을까를 보면,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6절에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한다. 십자가가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심으로 화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로 소멸된 것은 율법이다. 율법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을 때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없었다.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율법을 통해서 의를 이루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다. 율법에 의해서 인간은 죄인임이 드러났고 심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원수로 부각되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를 이루시고 그 의가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되셨다. 이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십자가 밖에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법을 지켜야 했다. 법을 지키는 것이 의가 되었고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악으로 규정되었다.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을 비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신앙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단순히 교리적인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만 화목하게 한 것이 아니라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다. 둘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를 뜻한다. 이들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것이 십자가이다. 그리고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막혀 있던 담은 율법이다. 이 율법으로 인해서 서로 원수의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이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세계에서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이방인과도 원수 된 관계에 있을 이유가 없고 한 몸의 관계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된다. 이것이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은 신자가 한 몸의 관계로 함께 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으로 구분될 수 없다. 모두가 동일한 존재이다. 다른 사람보다 교회 일을 좀 더 열심히 한다면 그러한 마음과 조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 우월감을 가져선 안된다.

교회는 둘이 하나 되어 하나님과의 화목 안에서 영원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이러한 교회됨을 스스로 허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에 분열이 있다면 그 원인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고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여김 받게 되었다.

 

10: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 시 돼

1. 부활의 증거:

a 빈 무덤

유대 당국자들이 가져갔을 거라고 반박: 시체를 공개했었을 것이다.

도둑들:귀중품만 가져가지 시체를 가져 가진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 죽음을 각오하고 부활을 전했다.

b.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서 나타나심. 500명에게 한 번에 보여 주셨다. 실제로 손과 몸을 만질 수 있었다.

2. 왜 부활이 중요한가?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기에 지금의 목숨이 그들의 전부이다. 다른 삶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간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좀 더 멋있게 편안하게 좋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꿈꾼다.

그런데 신자는 부활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자신이 말하는 부활이 진리라면 부활을 믿는 자로서 세상과는 다른 삶이 있어야 한다.

부활이란 단순히 다시 산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한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의 세월이 흐르고 끝날 것이고 시간이 없는 영원의 세계에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부활이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신자에게는 세상에 좋게 보일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부활이란 없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동일하게 산다면 입술은 부활을 말하되 마음은 부활을 믿지 않는 거짓 신앙일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만 나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확고한 근거로 증거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부활이 없고 영원한 세계에서의 새로운 삶이 없다면 믿음은 분명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것은 적어도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 내세가 준비되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부활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허망하게 비춰질 수밖에 없다.

부활의 자리에 서 있으면 실패가 실패가 아님을 알게 된다. 어차피 사라질 세상 속에서의 실패는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잠시 동안의 괴로움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실패의 자리로도 밀어 넣으실 수 있는 것이다.

42절: 10: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판단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결국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장차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의 나라에 참예할 자와 영원한 사망에 처할 자로 나뉘게 된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죽음 이후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이어진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우리를 기다린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선악 간에 행한 대로 심판대 앞에 선다. 때문에 신자는 심판대를 생각하며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며 살아가야 한다.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만난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의 심판대일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깨끗한 마음을 따르는 사람들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이다. 심판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리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의 기준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그 기준을 미리 보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선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지 않는 것이 악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힘썼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다.

결론: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평케하셨고 또한 우리들끼리 화평할 있도록 하셨으며 부활하셔서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분이시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우린 이런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힘 있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