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백부장이란 지금의 군대로 말하면 '중대장'급의 계급이다. 그렇다면 고넬료는 결코 낮은 계급의 군인이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체면에 크게 손상이 되고 출세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구제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넬료를 구원하신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선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에게 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왜냐하면 인간의 어떤 선한 행위로는 절대 구원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고넬료가 아니라 베드로임을 알 수 있다. 간단하다. 베드로가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보고 고넬료 집에 가고 => 10: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하나님은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고자 하셨다. 베드로를 보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의 집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10: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단일신론 주장하는 이단도 있었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고넬료의 구원은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 즉 전하는 자로 인해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복음을 듣게 된 것을 볼 때 본문의 주인공은 베드로다. 선한 일에 힘쓴 고넬료가 아니다.
본문 해석:
베드로에겐 문제점이 있었다.
11~15절을 보면 베드로가 배가 고파서 뭔가 먹고자 할 때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고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 그릇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외치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13절)고 한다. 그리고 그 외침에 대해서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14절)고 말하면서 먹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다시 하늘에서 외치기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절)고 하고,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 안에는 평소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으로 규범 한 것들이 들어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전부터 해 오던 대로 부정한 것은 먹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과연 하나님이 하늘에서 그릇을 내리시는 일까지 하시면서 베드로로 하여금 부정하다고 하는 음식을 먹도록 하신 의도가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우선 결론적으로 말하면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먹든 안 먹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유대인들이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돼지고기를 먹든 안 먹든 그것이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믿음이 있고 먹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이런 지엽적인 싸움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돼지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쓸데없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기도 하고 싸움까지 한다. 물론 현대교회에서 이런 음식 문제로 다투게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예로 주일 문제를 들 수 있다.
주일에 대해서는 크게 두 입장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안식일 규례처럼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식일 규례는 구약으로 끝났으니까 주일을 따로 지킨다는 것은 신약에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서로 주일에 돈을 쓰는가 쓰지 않는가? 주일에 음식을 사 먹는가 사 먹지 않는가? 라는 싸움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저는 둘 다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일에 돈을 써야 하는가 쓰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에 돈을 써도 된다고 하는 것이나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나 똑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기 신앙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신앙을 서로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잘못되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신앙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드로가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을 무너뜨리는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은 베드로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그런데 우리는 내 신앙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가 많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워왔고 알아왔고 몸에 밴 자기 신앙으로 사람들을 대한다. 그래서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강요할 것이고, 만약 먹는 자는 신앙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라고 했다. 음식을 구분하는 베드로에게 로마인은 이방인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교제하지 않는 것이 베드로의 신앙이었다. 마치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아무리 고넬료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해봐야 베드로는 자기 신앙으로 그 사람들을 거부할 것이 뻔하지 않을까? 그래서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용납하신 자를 사람이 자기 방식의 신앙을 고집하며 거부할 수가 없음을 깨우치기 위해서 부정한 것을 담은 광주리를 내리시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하나님이 그의 구제와 기도를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고넬료의 행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넬료를 구원하시기로 작정(용납) 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작정(용납) 한 사람을 자기 신앙과 고집으로 배척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신 것을 자신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늘에서 그릇이 내려온 환상을 보이셨다.
우리에게도 베드로 식의 자기 신앙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 신앙으로 하나님이 용납하시고 나에게 보내신 형제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예수님은 악하고 더러운 사람을 위해서 피 흘리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깨끗해졌다. 예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자기 신앙을 내세워서 더럽다, 악하다 할 수 없다.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더욱더 안된다. '내가 이렇게 하니까 너도 이렇게 하라'는 것은 상대방을 자신의 신앙으로 끌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거나, 주일에는 돈을 써라 말라라는 식의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이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자기 신앙을 보이는 것뿐이다. 그것보다는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식의 신앙을 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형제를 위해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말이다. (롬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상대를 평가하는 것!
이것이 복음 전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이 방 사람 고넬료를 전도하기 위해서 먼저 베드로를 변화 시켜야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이 쓰시고 기뻐하시는 복음 전도자가 되려면 베드로와 같이 모습이 변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베드로는 아직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온전한 도구는 아니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는 아직까지 율법적인 구별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넬료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에게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깨끗하고 이방인은 더럽다는 구별 의식이 없어야 했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그와 같은 율법적 의식이 남아있었고, 때문에 고넬료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었다. 결국 베드로는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문제 있는 도구였을 뿐이었다.
베드로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단지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방인을 더러운 자로 여기는 옛날 사고방식이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떻게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위한 도구로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하나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고쳐 가시면서 하나님의 일에 쓰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자신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일에 쓰이는 도구라는 말은 서슴지 않고 하지만 나 자신이 과연 온전한 하나님의 도구인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과연 하나님의 일에 쓰일 수 있는 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구이기에는 부족하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도구로서 부족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고쳐 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고쳐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일하시거나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 자신에게 있다.
고넬료와 베드로 사이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성령이 개입하셔서 일을 이루어 가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일이 생략되는 부분은 전혀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성령이 일하신다는 것이 인간의 일이 생략된다거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일해야 일이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우리가 행동해야 하나님의 일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쓰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환상을 보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베드로를 고쳐 가셨다. 그리고 스스로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하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이웃 사랑을 실천하자' 이것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이웃을 우리에게 보내신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에는 너무나 문제투성이인 우리 자신을 고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깨닫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을 거쳐서 신자는 스스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20절에 보면 '내가 저희를 보내었노라'라고 하신다. 과연 누가 목표일까? 바로 베드로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내가 꺼려 하고, 무시할만한 사람을 내게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여러 이웃을 있게 하시는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문제가 되는 이웃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제투성이인 나를 고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서 누군가를 탓할 수가 없는 것이고 바로 나 자신의 문제를 보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사람들은 일의 결과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결과, 많은 결과가 없을 때는 실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이루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을 이루어 가시길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고치시는 것이다.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달라지게 만드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일의 결과는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고쳐지고 달라져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결과다. 이그 결과가 있기에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봉사하게 되고 섬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의 열매는 고쳐지고 달라지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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