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 - 사도행전 9장 23-31절

차작가 2023. 12. 12. 11:56

본문 해석:

31절에 그리하여라는 것을 볼 때 앞 내용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앞의 내용은 사울이 고난 받은 내용이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도저히 교회의 평안과 든든함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사울이 변화된 것과 유대인들의 핍박이 수그러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 것이 근본 요인이 될 수는 없다.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고 말하지만 당시 초대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평안의 상태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을 때 교회가 힘을 얻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성장해 가는 그런 상황으로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성령으로 힘입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교회가 핍박을 받고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고난을 받았다. 그러므로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말은 고난과 고통이 없는 편안함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31절이 '그리하여'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하여'라는 말은 '이런 일로 인하여 이렇게 되었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일로 인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어떤 일이라는 것은 교회가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거나, 서로 사랑했다거나, 봉사를 했다는 것이 아니고 사울의 고난을 말한다.

우리는 사울이 예수를 믿음으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다. 전에는 같은 형제로 지내던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였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26절에 보면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지만 다 두려워하여 사울이 예수의 제자 된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얼마 전만 해도 예수 믿는 자를 죽이고 잡아 가두기 위해 살기등등하여 다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들 누가 그것을 쉽게 믿으려고 했을까? 오히려 예수 믿는 자를 색출하기 위한 위장술로 여기지 않았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바나바가 사울에게 주가 나타나신 것과 사울이 주를 믿게 된 일을 해명함으로써 겨우 오해가 풀리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29절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예수에 대해 말하며 변론함으로써 다시 그들이 사울을 죽이기를 힘쓰게 되고 사울은 다소로 피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 나서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울이 당한 죽음의 위기들과 고난들로 인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것이다.

도대체 사울이 당한 고난들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31절의 말씀을 보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는 말 뒤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보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살아가는 것이 곧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과 연관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주를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로 진행했다는 것이 무엇을 배경으로 하는 말이냐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사울이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주를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로 살았고, 그것이 곧 교회로 하여금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고난과 어려움이라는 것이 비록 우리들에게는 싫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사실 신앙은 고난과 어려움에서 증거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앙은 증거 된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고난과 어려움을 하나님의 징벌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신앙의 꽃이 피고 증거 되는 것인데 우리는 신앙을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고난을 막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편안함과 좋은 환경이 계속 이어지고 점차 더 좋게 나아지기를 위한 신앙 아닌 신앙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 되게 해주실 것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형편과 환경으로 밀어 넣으신다고 해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수시로 절망과 낙심의 현장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들을 통해서 세상은 내 힘으로 내 뜻대로 살아가지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붙들려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이것이 아니라면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과 어려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고생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그래서 31절을 다시 보면 교회의 평안과 든든함은 두 가지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성령의 위로로 설명할 수 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경외(phobo)의 뜻: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주눅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놀라움과 존경심으로 서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주권 때문에 하나님을 더 알고자 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서 바라보는 자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게 된다.

신자가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배우는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성경공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이런저런 쓴맛을 겪고 만남으로써 배워가고 알아가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할 보잘것없는 인생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주를 경외하는 것이다.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는 입장에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 뭔가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뭘 받으시겠는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받으실만한 것은 없다. 있다면 '나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일 것이다. 고통과 어려움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라는 이 고백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최고로 경외하는 것이다.

2. 성령의 위로

성령의 위로도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복 주신 것이다'라는 게 아니다. 성령의 위로는 고난과 고통에서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이다. 낙심과 절망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성령의 위로이다. 비록 육신은 고통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을 절대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고통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천국으로 이끌어가실 것임을 믿게 하는 것이 성령의 위로이다.

고난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남는 것은 낙심과 절망뿐이다. 그러나 어떤 고난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심을 보게 된다면,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갈 수 있다. 돈이 든든함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에 돈이 없는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얼마든지 평안함과 든든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이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말하고 그리하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갔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수가 늘어갔다는 것은 교회 부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핍박에서도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생명은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지 않은 이상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

고난과 어려움은 분명 고통이다. 그리고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안다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주시고자 하시는 좋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도 그 시작부터가 고난이고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 때문에 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주가 사울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울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결론:

신자에게 든든함과 평안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시기 위해서 있는 것을 빼앗아 가시기도 하신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실망과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주를 바라본다는 것, 이것이 평안하여 든든하게 서가는 것이다. 이러한 평안과 든든함이 우리의 삶에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