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를 때 - 사도행전 9장 10~19절

차작가 2023. 12. 12. 11:52

성경:

10절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절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환상 중에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절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절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절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본문 해석:

본문 배경: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 사울을 찾아 데려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아나니아는 먼저 강한 의혹을 나타내며 거부감까지 느꼈다.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너무도 현실에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사울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스데반 집사를 처형하는데 앞장서서 현장 지휘했고, 믿는 자들을 체포하는데 열심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다메섹까지 원정 핍박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니아가 선뜻 순종하지 못한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순종을 요구하실 때도 있다.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첫 번째는 일단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상식에 맞지 않는 명을 하신 경우>

1. 기드온과 300군사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7: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 7: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 매여 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7: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도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7: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7: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7:21 각기 제자리에서 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7: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

2. 여리고 성 함락

6: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6: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3. 예수님과 베드로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5 시몬이 대답하여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4. 아나니아와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울이 앞으로 주님과 그 역사를 위해서 자신이 행한 박해와 비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까지 주님의 이방인 사역에 쓰임 받으리라는 말씀(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을 하시자 지체 없이 일어나 사울을 만나 그를 안수하고 힘을 얻게 해서 주님의 역사 울타리 안으로 인도한다.

 

사울이 변할 수 있는 확률은 아마도 5000분의 1보다 더 적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일어나 순종을 하니 역사가 일어났다.

"순종"

세계에 흩어진 여러 가지 선교 기관 가운데 “위클리프성경 번역회”라는 선교기관이 있다.

그들은 신앙에 투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어학에 특별한 재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미나 아프리카나 조그마한 나라 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쓰는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그 곳에서 그들은 언어를 만들어 주는 일을 한다.

그래서 그 언어를 가지고 성경을 번역하고 있다.

한 사람이 마태복음을 번역하고 죽으면 누군가가 뒤를 이어 다시 그 곳에 좇아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사람이 가서 사도행전을 번역한다.

이 선교회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하나가 남미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성경 번역을 하다 보니까 그 마을 언어 가운데 “순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그 일을 꼭 하라고 하면서 “꼭 해야 된다”이런 뜻으로 말을 하는 가운데 계속 이 말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그 일을 꼭 해야 된다. 네 모든 마음으로”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심부름 가는 아들 뒤에서 아버지가 말했다.“네 마음을 나누지 말라”그래서“순종”이라는 단어를 번역하기를“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길게 번역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두번 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은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이다.

1) 기드온의 300 용사가 주는 교훈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한다. 300명으로 너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300명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300이란 수를 가지고도 메뚜기 같은 군사와 모래알처럼 많은 수의 약대를 소유한 힘 있는 미디안을 이길 수가 있으시다는 것이다. 결국 300명이란 수는 300명의 용사됨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이다.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처럼 많은 수의 군사를 이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32,000명의 수를 300명으로 줄이게 하심으로서 승리는 인간이 힘을 소유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결국 기드온에게 힘은 여호와 자신이지 많은 군사력도 아니고 약대의 수도 아니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힘 있는 자라는 뜻이고, 그런 이유로 기드온을 '큰 용사'(삿 6:12)라고 부르셨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을 하나님에게 구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힘을 소유하길 원한다. 힘만 있으면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만약 힘을 부여한다면 어떤 속성을 드러낼까? '인간이 드러낼 속성은 '역시 내가 힘이 있다'라는 것이다.

300명만 남게 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는 인간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바르게 정립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관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힘을 달라는 요구를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신뢰하고 살아가면 된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로 살아가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2) 여리고 성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빙글빙글 돌았을 때 무너진 것처럼 가지고 싶은 땅이 있으면 그 땅을 이스라엘처럼 돌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기를 치기도 한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함락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을 주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6일 동안 한 바퀴씩 돈 것과 칠 일째 일곱 바퀴 돈 것에 대한 구별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 째는 복을 주사 안식하셨다. 즉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안식할 수 있는 완전한 나라라는 증표가 7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나라가 깨어져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완전한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시겠다는 것이고, 그 나라를 주시겠다는 것을 7일째 일곱 바퀴를 돌 때 여리고 가 무너지게 함으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6일 동안 한 바퀴씩 돈 것은 인간의 일이다. 그러나 7일째 일곱 바퀴를 돈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7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일곱 바퀴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증표이다. 6일 동안 여섯 바퀴를 돈 것은 인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모든 인간의 노력을 묵살하고 오직 하나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을 칠일 째 일곱 바퀴를 돌게 함으로서 보여주신 것이다.

7이란 숫자는 이것만이 아니다. 일곱 제사장, 일곱 양각 나팔도 있다. 하나님은 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일한다'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3) 아나니아가 배운 것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

주님이 사울을 찾아오셔서 사울을 고치셨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이고 권능이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저 사람은 안된다'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그가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고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사람이 안된다고 하는 일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이다. 아나니아에게 역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나니아의 생각은 사울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성도에게 해를 끼친 그러한 자가 주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인간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한 인간의 생각은 항상 인간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여 가능과 불가능의 여부를 따지게 된다.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결론은 결국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한 인간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사울의 얘기에 아나니아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불신앙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내세워서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가를 증거하셨다. 인간이 안된다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만약 아나니아가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된 결과로 여겼다면 사울에 대해서도 '하나님이라면 하신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울 같은 사람은 안된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자신은 사울과 다른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권능이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믿게 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믿음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을 볼 때 마치 하나님이 전혀 없이 인간들끼리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의 믿음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 하며 살아가게 된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고 빛이 비췬 것만이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다. 그것이 힘이 되어서 사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 그 자리에는 사울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다만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사울에게만 주님의 음성으로 들린 것이다.

결론: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먼저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깨닫게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