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묵상

구원의 삼박자 - 사도행전 8장 26-40절

차작가 2023. 12. 12. 11:40

본문 해석:

1. 구원 역사의 첫 번째 선행조건은 성령의 역사이다.

8: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결과적으로 내시가 구원을 얻고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빌립을 만났기 때문이고 빌립은 성령의 지시에 순종해서 내시에게 나갔기 때문에 내시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처음 시작은 바로 성령님의 지시에 있었다.

성령의 지시가 아니었으면 빌립이 내시를 만나러 가사로 갈 수 있었을까? 내시가 빌립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가 읽고 있던 이사야서를 이해하며 그 안에 숨겨진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을까? 모든 시작이 성령님으로 부터 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구원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이다.

 

2. 구원 역사의 두 번째 선행조건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8: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가사는 예루살렘 서남쪽으로 약 50마일, 지중해에서 약 2,5마일에 위치한다. 복음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전해야 하는데 광야로 가라는 말에 인간의 상식과 어긋나는데도 순종하며 갔다.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당시 에티오피아는 애굽과 맞먹는 국력이었다. 비록 내시지만 여왕 간다게의 신임을 얻는 자였기 때문에 권력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고 그를 수행하는 수행원들의 수도 대단했을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신변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지만 순종하며 갔다.

구원 역사의 두 번째 선행조건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나의 상식과 나의 기대보다 성령님의 지도를 받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 베드로의 경우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

본문에서처럼 성령이 빌립에게 지시하는 것과 같은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령이 빌립에게 지시하는 것은 지금도 그렇게 우리를 지시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빌립이 과연 누구에 의해서 움직이고 일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빌립은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주의 사자에게 이끌리고 성령의 지시를 받아 살아간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성령이 빌립에게 지시하는 것과 같은 내용은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살아가는 빌립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한마디로 말해서 빌립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편한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빌립만이 아니라 성령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든 모습이다.

신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고 주장하신다. 이것이 기독교 신자이다. 나 말고 다른 존재가 간섭하면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나 좋을 대로, 즉 내 마음대로 살아갈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성령 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목적은 성령으로 인해서 어떤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자가 성령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살게 하지 말아 달라'라는 소원이 담겨 있어야 한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내 길을 가는 것이고 결국 그 길은 멸망의 길임을 알기 때문에 능력이 있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영에 주장 받고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이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 편함과 내 이익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무엇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행동하는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비록 나에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간다면 그가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인 것이다.

본문에서 나타나는 빌립은 분명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성령이 그를 주장하면서 그 인생을 다스리고 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다르시면서 세상에서 잘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빌립만이 아니라 사도들 모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성령이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하나님을 위한 죽음이며 고통이었다. 스데반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빌립이 성령에 이끌린 결과를 보면, 비록 빌립이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그에게 세례를 주기까지 했지만 결과는 성령이 그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 가셨다.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신자 되게 한 것 때문에 내시의 집에 가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빌립의 행동이 하나하나 모아져서 빌립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일을 하면 그 일의 결과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욕망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빌립을 내시에게 보내신 것은 내시를 위한 것이지 빌립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성령을 보내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위해서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성령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구원 역사의 세 번째 선행 조건은)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이다.

말을 끌고 물가로 가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최선을 다해 전도해도 전도가 되지 않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본인에게 구원 받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릇이 있어야 물을 담듯, 구원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시는 세상의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수 개월 동안 예루살렘으로 병거를 타고 예배하러 왔다. 그의 마음이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먼 거리를 달려 왔지 않았나 생각된다 구원의 은혜만이 사람의 영혼을 충족시켜 준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한 세상적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면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재정 맡은 사람으로 일정 기간을 비운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그는 영적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을 어떤 것으로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각오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내시는 인종, 문화적 차이를 무릅쓰고 장거리를 여행하여 예루살렘까지 왔으나 그저 바깥 마당에만 머물러야 했다. 세상적 체면이 깎이는 대목이다. 그래도 감사했고 돌아오는 길에도 성경을 읽었다.

8: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8: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이런 사람이 성령님의 눈에 띈다. 부르짖는 자가 먼저 띄듯, 내시의 이런 간절한 마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순종하는 빌립을 쓰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구원을 확실히 하셨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말씀으로 하심 같이 인간의 구원도 말씀으로 하신다.

내시도 성전 바깥 뜰에서 성전의 겉모습이나 희생제물을 드리는 장면에만 머물지 않고 말씀을 펴고 읽었기 때문에 그가 구원에 이르고 세례까지 받을 수 있었다.

결론:

구원의 역사는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님께의 온전한 순종과 구원에의 갈급한 심령 이 삼박자가 함께 만날 때 구원이 가능하다. 구원 받은 우리의 삶에 성령님의 역사에 순응하고 말씀에 따라 씨름하며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한다.